"'이기적인 놈' 욕 들어도... 나는 명절을 거부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이기적인 선언

등록 2016.02.07 20:19수정 2016.02.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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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번 설에는 시골 안 가고 집에 있을게요."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나름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첫 선언은 아니다. 매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실패하는 이유는 항상 같다. 더 이상의 말대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짧지만 짜증어린 말에 말문이 막힌다. 두려움보다는 아버지의 고집에 대한 피곤함이 앞섰다. 그런데 올해는 할머니댁에 가는 피곤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버지의 거절에

"왜요?"

라는 대답이 입에서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왜요'는 '일본 사람이 덮는 이불'이라는 교육을 받은 내가 '왜요'라고 묻는 것에 아버지는 놀라셨는지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몇 초 지난 뒤 아버지가 꺼낸 근거는 "명절에는 다 같이 모여서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그래야 한다. 그게 가족이야"였다.

시골에 가지 않겠다는 나의 선언은 요즘 것들의 '이기적 개인주의'로만 여겨졌다. '가족'을 내세우는 아버지에게 나는 가족의 소중함도 모르는 파렴치한 놈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나는 단지 나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에라 이기적인 놈"
"에라 이기적인 놈"MBC 금나라와뚝딱

우리가 아직 가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무장해제'하고 친척들 앞에서 씹기 좋은 먹잇감으로 던져져야 했다. 돈이 되기는커녕 돈을 내면서 일해야 하는 독립언론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친척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놈의 한철 낭만 좇기 정도로 치부했다.


반박하면 또다시 '가족'의 이름으로 응징당한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정 당하는 폭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결국 내가 나를 보호할 방법은 명절날 친척들을 만나지 않는 것밖에 없던 것이다.

내가 이기적인 것은 결국 네 탓이란다


'이기적 개인주의'는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생존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친척들이 날 죽인다는 뜻은 아니다. 생존 본능은 나를 위협하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다. 온종일 밥하고 전 부치고 제사상 차리는 살인적인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 이기적 개인주의다. 우리 학교 교수님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평가받으며 깎아내려 지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 이기적 개인주의다.

 모두에게 좋은 명절이 될 수 없다면...
모두에게 좋은 명절이 될 수 없다면...한국여성민우회

명절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이기적 개인주의라는 말로 비난하기 전에 사람들이 왜 이기적이게 됐는지부터 생각하는 게 순서다. 이기적인 것은 명절을 거부하는 우리가 아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순종하는 아내, 자녀로 이뤄진 가부장적 정상가족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강제 동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할머니가 좋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촌도 좋다. 여기저기서 '조리돌림' 당한 뒤 널브러져 있는 나를 위로해주는 고모도 좋다. 상냥한 할머니와 고모, 사촌들을 못 본다는 것은 슬프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제일 좋다. 명절이 더 이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나는 명절을 거부한다.
#설 #선언 #명절 #이기적 #개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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