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은 기억한다> 겉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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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은 트라우마에 관한 '현대의 고전', '바이블'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는 책이다.
평생을 트라우마 연구에 바친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의 학자적 열정과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트라우마의 본질과 개념, 파괴적인 영향과 치유법을 밝히고 적용해 온 30여 년간의 삶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최신 정신의학과 뇌과학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 결과가 600쪽을 훌쩍 넘는 거작 속에 담겨 있다. 신경과학, 발달정신병리학, 관계 신경생물학 등 생소한 분야의 임상 사례를 통해 학대나 방치로 발생하는 영향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읽기가 어렵거나 지루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저자의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 트라우마가 특별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공감 때문인 듯하다.
트라우마는 불행을 운명처럼 달고 사는 특별한 소수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인 5명 중 1명은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4명 중 1명은 부모에게 몸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맞은 기억이 있다. 커플 3쌍 중 1쌍은 상대의 신체 폭력에 시달린다. 미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알코올에 중독된 친인척의 손에서 크고, 8명 중 1명이 엄마가 맞거나 타격받는 모습을 직접 본다. 책 첫머리에 인용된 미국질병통제 센터의 조사(관련 보고서 기준 1998년) 결과다.
저자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영향이 미치는 범주는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인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거나, 한 가족 안에서 어두운 비밀로 존속해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진다.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 즐거움과 친밀감을 느끼는 능력, 생물학적인 특성과 면역 체계에도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는 그 일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군인은 급격한 분노와 정서적 무감각으로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다. 남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으면 아내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이 부족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 어릴 때 가족 안에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타인과 안정적이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4쪽)
트라우마 환자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그 파괴적인 영향력이 깊고 큰 것만큼이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엄청나다. 문제는 방법과 방향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88년 출시된 프로작 같은 항정신성 약물이 정신 질환 치료의 본격적인 주류가 되면서 지난 30년 이상 약물 치료가 정신의학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이를, 정신질환을 '뇌-질병 모델'에 따라 약물을 통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핵심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약물은 아이들을 다루기 쉽고 덜 공격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의욕과 놀고 싶은 마음, 호기심 등 아이가 한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는 구성원으로 성숙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에도 영향을 준다. 항정신병 약을 복용하는 어린이는 병리학적인 비만과 당뇨병에 시달릴 위험도 높다.' (79쪽)저자는 뇌-질병 모델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서로를 파괴하는 능력만큼 서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다. 대인 관계와 공동체 관계의 회복은 다시 행복을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는 자신과 타인을 변화시키는 힘을 준다.
트라우마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켜 어른과 아이 모두 안전하게 머물고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도 가능하다. 뇌-질병 모델은 이와 같은 '인간다움의 본질' 측면을 무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인간이 포유류이며 사회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트라우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놀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뇌의 사회 참여 시스템을 망가뜨림으로써 협력하고 보살피는 능력, 사회에 유익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이나 성인들을 관리하는 기관들은 한 인간의 존재에 기본 토대가 되는 감정적 참여 시스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그저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거나 불쾌한 감정, 문제가 되는 행동을 억제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 (552쪽)1997년 보고서를 기준으로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여성 1200만 명이 성폭력 희생자다. 전체 성폭력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 소녀들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00만 명의 어린이가 아동 학대 희생자나 방치된 아이로 보고된다. 이 중 100만 명은 당국에 의해 강제 조치를 당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국외 전쟁 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보다 열 배가 많은 아이들이 집 안에서 자신을 돌보거나 아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을 겪고 있다며 저자가 인용하는 통계들이다. 저자가 보기에 공중 보건 분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트라우마이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한 사회의 가장 대대적인 발전은 트라우마를 계기로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남북 전쟁 이후 폐지된 노예제도, 대공황 이후 신설된 사회보장제도, 제2차 세계대전 뒤 만들어져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산층 비율을 늘린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들이 구체적인 예들이다.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와 같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제대로 치유해야 하는 이유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어린 사회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1.20. / 659쪽 / 2,2000원)
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을유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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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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