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박 대통령, 트라우마 때문 아닐까

[서평]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

등록 2016.02.12 15:13수정 2016.02.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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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양친을 '흉탄'에 보냈다. 22살이던 1974년에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27살이던 1979년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잃었다. 꽃다운 20대 청춘기에 양친을 잃는 흉사를 겪은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자 부친이었지만 그가 죽자 최측근들이 미련없이 떠나갔다고 한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대통령은 이를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부 비판적인 호사가들의 말처럼 '배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로 논란이 됐던 박 대통령의 이면에는 이런 비극적인 개인사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 <몸은 기억한다> 겉표지
▲ <몸은 기억한다> 겉표지 ⓒ 을유문화사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은 트라우마에 관한 '현대의 고전', '바이블'이라는 찬사가 붙어 있는 책이다.

평생을 트라우마 연구에 바친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의 학자적 열정과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트라우마의 본질과 개념, 파괴적인 영향과 치유법을 밝히고 적용해 온 30여 년간의 삶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최신 정신의학과 뇌과학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 결과가 600쪽을 훌쩍 넘는 거작 속에 담겨 있다. 신경과학, 발달정신병리학, 관계 신경생물학 등 생소한 분야의 임상 사례를 통해 학대나 방치로 발생하는 영향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읽기가 어렵거나 지루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저자의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 트라우마가 특별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공감 때문인 듯하다.

트라우마는 불행을 운명처럼 달고 사는 특별한 소수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인 5명 중 1명은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4명 중 1명은 부모에게 몸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맞은 기억이 있다. 커플 3쌍 중 1쌍은 상대의 신체 폭력에 시달린다. 미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알코올에 중독된 친인척의 손에서 크고, 8명 중 1명이 엄마가 맞거나 타격받는 모습을 직접 본다. 책 첫머리에 인용된 미국질병통제 센터의 조사(관련 보고서 기준 1998년) 결과다.


저자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영향이 미치는 범주는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인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거나, 한 가족 안에서 어두운 비밀로 존속해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진다.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 즐거움과 친밀감을 느끼는 능력, 생물학적인 특성과 면역 체계에도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는 그 일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군인은 급격한 분노와 정서적 무감각으로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다. 남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으면 아내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이 부족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 어릴 때 가족 안에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타인과 안정적이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4쪽)


트라우마 환자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그 파괴적인 영향력이 깊고 큰 것만큼이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엄청나다. 문제는 방법과 방향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88년 출시된 프로작 같은 항정신성 약물이 정신 질환 치료의 본격적인 주류가 되면서 지난 30년 이상 약물 치료가 정신의학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이를, 정신질환을 '뇌-질병 모델'에 따라 약물을 통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핵심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약물은 아이들을 다루기 쉽고 덜 공격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의욕과 놀고 싶은 마음, 호기심 등 아이가 한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는 구성원으로 성숙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에도 영향을 준다. 항정신병 약을 복용하는 어린이는 병리학적인 비만과 당뇨병에 시달릴 위험도 높다.' (79쪽)

저자는 뇌-질병 모델에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서로를 파괴하는 능력만큼 서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다. 대인 관계와 공동체 관계의 회복은 다시 행복을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는 자신과 타인을 변화시키는 힘을 준다.

트라우마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켜 어른과 아이 모두 안전하게 머물고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도 가능하다. 뇌-질병 모델은 이와 같은 '인간다움의 본질' 측면을 무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인간이 포유류이며 사회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트라우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놀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뇌의 사회 참여 시스템을 망가뜨림으로써 협력하고 보살피는 능력, 사회에 유익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능력을 저해한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이나 성인들을 관리하는 기관들은 한 인간의 존재에 기본 토대가 되는 감정적 참여 시스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그저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거나 불쾌한 감정, 문제가 되는 행동을 억제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 (552쪽)

1997년 보고서를 기준으로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여성 1200만 명이 성폭력 희생자다. 전체 성폭력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 소녀들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00만 명의 어린이가 아동 학대 희생자나 방치된 아이로 보고된다. 이 중 100만 명은 당국에 의해 강제 조치를 당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국외 전쟁 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보다 열 배가 많은 아이들이 집 안에서 자신을 돌보거나 아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을 겪고 있다며 저자가 인용하는 통계들이다. 저자가 보기에 공중 보건 분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트라우마이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한 사회의 가장 대대적인 발전은 트라우마를 계기로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남북 전쟁 이후 폐지된 노예제도, 대공황 이후 신설된 사회보장제도, 제2차 세계대전 뒤 만들어져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산층 비율을 늘린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들이 구체적인 예들이다.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와 같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제대로 치유해야 하는 이유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어린 사회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1.20. / 659쪽 / 2,2000원)
덧붙이는 글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을유문화사, 2016


#<몸은 기억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 #을유문화사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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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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