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중앙북스
이경림 님이 빚은 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중앙북스,2011)를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틈틈이 이 시집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 차리다가 한두 쪽씩 찬찬히 이 시집을 읽습니다. 밥때랑 밥때 사이에 샛밥을 챙긴다든지 주전부리를 내밀면서 이 시집을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어느새 '할머니 시인'인 이경림 님은 할머니다운 숨결로 할머니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다만, 할머니이기 앞서 시인입니다. 그리고 시인이면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이기 앞서 어머니요, 어머니이기 앞서 딸입니다. 어머니이기 앞서 시인이고, 또 딸이기 앞서 시인입니다. 여러 모습이 한몸에 어우러진 삶이요 살림이고 사랑인 이경림 님입니다.
아버지, 살구씨 하나를 뜰에 심었는데 왜 /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장의 떡잎이 나오나요 (살구마누 장롱)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건 육만 년 전 / 내가 우리 딸을 낳은 건 삼만 오천 년 전 / 우리 딸은 지금 제 배 속에다 팔천 년째 아기를 키우고 있네 (늪)우리 어머니는 나를 언제 낳았을까요? 거의 안 떠오릅니다. 마흔 몇 해 앞서 나를 낳았을까요, 아니면 마흔하고도 사만 몇 해 앞서 나를 낳았을까요?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낳은 때는 언제일까요? 열 해쯤 앞서일까요, 아니면 십만 해나 백만 해 앞서일까요?
오늘 나는 이곳에서 살지만, 백 해나 이백 해나 삼백 해 앞서는 어떤 몸뚱이를 타고 이 땅에서 삶을 지었을까요? 아이들하고 '선문답'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는 틈틈이 시집 한 권을 읽으면서 머리통을 자꾸 쪼개고 다시 가르며 새롭게 쩍쩍 잘라 봅니다. 굳은 머리가 되지 말고, 열린 머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수수께끼를 헤아립니다.
왜 지구는 늘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는 안 어지럽다고 느낄까요? 어쩌면 우리는 늘 어지러운데 어지러운 줄 잊지는 않을까요? 왜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을까요? 왜 애벌레는 제 몸을 녹여서 나비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왜 잎사귀는 애벌레가 갉아먹힌 뒤에도 새로 돋을 수 있을까요? 왜 나무는 가지가 잘린 뒤에도 새로 날 수 있을까요? 왜 모든 주검, 사람 주검이든 벌레 주검이든 곧 흙으로 바뀔까요?
아이가 아버지한테 이것저것 온갖 수수께끼를 물을 적에 나도 이 아이한테 갖은 수수께끼를 내놓아 봅니다. 우리는 서로 수수께끼 놀이를 합니다. 아이는 아이한테 궁금한 대목을 묻습니다. 나는 나한테 궁금한 대목을 묻습니다. 얘야, 먼지란 뭘까? 얘야, 참말 밥이란 뭘까? 얘야, 왜 떡이나 빵은 달고 자꾸 손이 갈까? 얘야, 이는 왜 닦아야 할까? 얘야, 이 지구별 한복판에는 뭐가 있을까? 얘야, 왜 사람은 날지 않을까? 얘야, 왜 사람은 우주에서 살 생각을 안 할까?
할머니가 컸을 때 그림자도 있어? / 음― 할머니는 이제 크지 않아 / 왜? / 너무 오래 컸으니까 / 너무 오래 크면 그림자가 이 방에 누울 수가 없으니까? / 응, / 그럼 할머니는 어떻게 돼? / 조금씩 작아지지 / 계속 작아지면 어떻게 돼? / 먼지가 되지 / 먼지가 되면 어떻게 돼? / 먼지는 너무 가벼워 소파 뒤로 장롱 위로 날아다니지…… / 먼지도 그림자가 있어? / 먼지 그림자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을걸 (하룻밤, 푸른 호랑이 11)
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는 마치 수수께끼 꾸러미 같습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 꾸러미는 퍽 즐겁습니다. 할머니 시인이, 아니 그냥 할머니가 아이하고 주고받는 이야기가 시 하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흐름을 살피면서, 나는 오늘 우리 살림집에서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하고 되새겨 봅니다.
아직 봄이 아니어 퍽 쌀쌀한 날씨이지만, 신도 안 신고 맨손으로 흙놀이를 하는 두 아이가 자꾸 아버지를 부릅니다. 왜 부르니? 아버지는 오늘 깍두기를 담느라 바쁘거든? 아이들이 부르는 데로 쭐래쭐래 가 보면 흙으로 빚은 떡이며 빵이며 밥이며 국이 있습니다. 뒤꼍에 저희 흙놀이터를 마련해 주었더니 날마다 틈틈이 소꿉밥을 지어서 아버지를 불러요.
그래, 그렇구나.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너희들을 부르니, 너희도 너희 사랑스러운 손길을 담은 꿈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밥을 지어 너희 어버이를 부르는구나. 아버지는 너희 몸을 살찌우는 밥을 주고, 너희는 아버지한테 마음을 살찌우는 밥을 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