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한경희 여사의 고교시절1919년생으로 충북 대지주의 딸로 태어난 한경희 여사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등 신여성의 삶을 살았으나 해방 후 분단과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2016년부터 그녀의 이름을 딴 ‘한경희 평화통일상’이 제정된다.
사진제공 송기수
안기부에 따르면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암약한 송씨 일가 간첩단에서 20년 동안 재남 망책 역할을 한 것으로 규정된 한경희 여사는 다행(?)스럽게도 사건 발생 5년 전인 1977년 세상을 떠났다. 안기부는 간첩총책을 조사 한번 못한 채 간첩 조직망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사망으로 인해 기소되지 않은 한경희 여사는 재심 대상도 아니라서 명예회복이 되지 못한 채 '여간첩 한경희'로 남아 있다.
송기수씨는 올해부터 그녀를 기리는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송씨일가 간첩조작 사건을 직접 재조사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의 인연으로 한홍구 교수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 민주자료관과 평화박물관에 위탁, 운영하기로 했다.
성공회대 민주자료관과 평화박물관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학살과 고문, 간첩조작, 선거부정으로 헌법을 파괴해온 이들을 기록하자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다.
일제의 침략 앞에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던 1919년 출생한 고(故)한경희 여사는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신여성의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도쿄 무사시노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나 니혼대학 법학과에 유학 중이던 같은 고향 출신 송창섭을 만났다. 1941년, 그들의 결혼은 신문에 크게 날 정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송기수씨는 어머니 한경희가 그때 가장 행복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 부모님이 함께 계실 때 기억은 있으십니까? "너무 어려서...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가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아버지는 당시 엘리트였으니까 해방되고 중앙청 재무과에서 일하셨다는데... 당시는 엘리트 10명 중에 8, 9명은 좌익활동했을 때니까 좌익 활동하면서 수사기관에 쫒겨 다니고... 어머니가 심지어는... 글쎄... 이제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아버지가 숨어서 도망 다니다가 원효로에 있는 콩나물 공장에서 몰래 만나고는 했대요.
어느 하루는 두 분이서 만나다가 갑자기 '도망가라'고 연락이 와서 아버지는 담 넘어 가고, 어머니는 우리 4남매 중 누군가를 안고 있다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치마 밑으로 뭉개서 감춰 놓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어머니는 어떤 이념으로 무장했다기보다 남편 일이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떠셨습니까?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초등학교 3학년 때 즈음... 그러니까 한국 전쟁 이후지요. 어머니랑 같이 음성역에 갔었는데 경찰 2, 3명이 와서 갑자기 검문을 해요. 그러더니 어머니를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 같아요. 전쟁 전부터 계속 경찰들에게 시달렸으니까... 어머니가 사이다하고 건빵을 사 와서(흐느낌)... '꼼짝 말고 이거 먹으면서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안 오시는 거야... 그게 아침이었는데 저녁에 깜깜해 져서야 돌아오시는 거예요.
한 10시간쯤 기다린 것 같은데, 어머니는 그 때까지 경찰서에서 시달리신 거야. 경찰들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자기들 밥이었으니까(울음)...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자식들을 자꾸 충주로, 청주로 보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기 옆에 있으면 자식들이 고생하니까. 지금도 충북선만 보면 그 생각이 나고, 건빵하고 사이다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요."
'빨갱이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한경희는 해방 후부터 경찰의 감시와 취조에 시달리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북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송기수는 어머니의 허벅지 깊은 곳에 긴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에게 한참을 따져 물은 후에야 그것이 경찰서에서 고문받은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 전쟁 이후였다.
한경희 여사가 월북한 송창섭을 다시 만난 건 한국 전쟁 때였다. 남하한 인민군을 따라 내려온 송창섭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면서 한경희에게 "같이 올라갈래, 여기 있을래?"하고 물었다. 남아 있기를 선택한 한경희는 4남매를 두 그룹으로 나눴다. 송기수와 누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갔고, 형과 여동생은 한경희가 맡는다. 넷 중 하나는 살아남으라는 의미였다.
이후 한경희는 가치담배, 양담배, 껌, 초콜릿 등을 파는 허술한 좌판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하며 4남매를 부양한다. 그러다 1960년, 4월 혁명이 발생하자 송창섭이 다시 내려온다. 일본 유학시절 친구인 전 재무장관 김영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영선은 송창섭의 남파사실을 정보당국에 신고했다.
송창섭은 다시 북으로 올라가기 전, 한경희와 그의 장녀 송기복을 잠시 만났다. 이때의 짧은 만남이 '8차례 남파'와 일가친척을 동원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1960년에 아버지가 내려오셨을 때, 선생님은 만나셨습니까?"난 그때 너무 어려서 내려온 것도 몰랐어. 아주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어서 알았지. '아버지가 왔다 갔었다'... 안기부에서는 그 이후에도 아버지를 만난 것 아니냐고 엄청 맞았어요. 재판받을 때 무슨 비밀재판처럼 몇 사람만 불러서 증언 같은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북쪽에서 과장급 하던 남파간첩이라더라고.
그 사람이 충남 사람인데 60년대 후반 즈음 개성에서 밀봉교육 할 때 아버지를 만났다는 거야. 이 사람 말이 아버지가 김일성한테 대들어서 아오지 탄광으로 좌천됐다고 해요. 그래서 '아, 아오지 탄광이라는 게 실제로 있긴 있구나' 했지. 근데 이후에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서 더 높은 사람이 됐다는 거야. 이거 앞뒤가 안 맞잖아?"
- 안기부에선 그 이후에도 송창섭이 계속 남파되어 한경희 여사를 중심으로 한 간첩단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니, 생각을 해봐요. 1960년에 남파된 건 정보기관도 알고 있었는데, 남파 간첩 총책이나 했다는 사람이 매일 감시받는 사람, 그것도 자기 부인한테 또 간첩 총책을 맡긴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걸 몰랐다면 대한민국 정보부 자격이 없는 거지. 해방 후에 아버지 서류 몰래 감추고, 자기 만나러 온 남편 자수 안 시키고 돌려보내면 공작 총책이 되나? 공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할 여건이 안됐어요. 매일 감시받고 있었으니까. 그럴 거면 그동안 감시는 왜 했나요?"
어머니 이름 딴 '통일평화상'... 분단 상처 치유하는 계기 됐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