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류인석 선생의 아들인 류해동 선생이 친필로 쓴 <의암류선생약사>. 이태룡 박사는 "이 문서에서 안중근은 '13도의군'에서 이갑(李甲) 등과 함께 의무원(義務員)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독립운동사에서 13도의군은 1910년에 결성된 것으로 기록했으나 전후 맥락으로 볼 때 1909년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태룡
이 박사는 지난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6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업적과 하얼빈의거 사료 발굴을 위한 문학작품과 논문 공모에서 '일제의 비밀기록에 나타난 안중근의 풍모와 일제의 만행'이라는 논문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최근 이 박사는 류인석 의병장의 아들(해동, 海東, 1891~1981)이 부친과 함께 생활했던 바를 육필로 썼던 <의암류선생약사(毅菴柳先生略史 )>를 번역해 정리했다. 이 자료는 의거 당시 19살이었던 류해동 선생이 해방 이후 친필로 써놓았고, A4용지 크기 13쪽 분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종손 류연창(75)씨가 의암기념관에 기증해 보관해 왔다.
류해동 선생의 육필 자료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와 류인석 선생과 관계', '권총과 자금 출처'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13도의군'은 연해주지역 의병연합체이고, '도총재'는 '으뜸 총재'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뒤 일본관헌에 조사를 받으면서 13도의군을 숨기기 위한 의도로 '대한의군'이라 했던 것이다.
이태룡 박사는 "하얼빈 의거 계획은 안 의사 혼자서 한 게 아니었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하얼빈 의거가 있기 전 '대한의군'의 구성을 보면, 총독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金斗成, 류인석의 변성명), 대장에 전제덕·김영선, 영장에 안중근·엄인섭·백규삼(白圭三)·이경화(李京化)·김기룡(金起龍)·장봉한(張鳳漢) 등이었고, 군자금은 최재형(崔在亨)이 맡았다.
이태룡 박사는 "일제에 의한 간계로 연해주 동포사회의 지도자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었는데, 류인석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1909년 6월 그를 중심으로 연해주 의병 연합체 13도의군도총재가 형성되고, 이범윤·이남기(李南基)·이상설(李相卨)·정재관(鄭在寬) 등의 추대로 13도의군도총재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의암류선생약사>에서 안중근 의사가 등장하는 대목은 두 군데다. 그 하나가 류인석 선생이 안중근 의사를 격려한 대목이다.
"(1909년) 9월 의암이 맹령(孟嶺, 몽구가이)으로 이주하니 이상설이 내방하였고, 이어 안중근과 정재관이 찾아왔는데, 안중근이 북만주로 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처단하겠다고 고하였다. 이에 의암은 '다행히 죽이면 국가 원수뿐만 아니라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죄를 더욱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는 대의를 천명하여 세계인으로 하여금 이를 인식시키는 것이 좋다'라고, 격려하였다."또 한 대목이 권총의 출처와 관련한 내용이다.
"(류인석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김기한(金基漢)·이진룡 두 사람과 같이 배를 타고 오다가 이진룡이 권총 닦는 것을 보고 자기 것과 서로 바꾸기를 요청하매, (이진룡이) 불응하여 취중에 언쟁이 일어나니 정재관 씨가 말리며, '안 형이 이등을 사살코자 하는데, (이) 형의 총이 나아 보여 바꾸고자 함이라' 하매, 이진룡이 총을 주며, '필요하다면 옛날 형가(荊軻)일(거사)에 번오기(樊於期)같이 목이라도 베어 달라면 베어줄 터인데, 실정을 말하지 않음은 나를 도외시(度外視)함이 아니냐?' 하며, 다시 술을 나누며 해항(海港:블라디보스토크)을 건너와 며칠 후 안중근 이 하얼빈(哈爾濱)에 가서 역두(驛頭)에서 이등(이토 히로부미)을 쏘아 거꾸러뜨리니, 선생이 기꺼워 해항에 건너가 종자(從者)로 하여금 큰 잔치를 베풀게 하시다."이태룡 박사는 "안중근은 거사 후 이진룡(일명 석대(錫大)) 의병장이 권총과 여비 130~140 원을 마련해 주었는데, 평안도에서 온 이석산(李錫山)이란 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여 빌린 것이라고 하였다"며 "무기구입을 위해 연해주에 왔던 이석대 대신 이석산이란 가명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