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리본.
김유철
전 국민이 TV와 스마트폰으로 참사를 구경해야 했던 충격적인 기억은 아직도 그대로다. 2년 전, 우리는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구경꾼' 정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가와 국민, 21세기와 첨단의 현대 민주사회.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 큰 배 안에 304명이, 그것도 섬과 가까운 연안에서 아무런 안내와 구조도 없이 수장되는 동안 대통령은, 군대는, 공권력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제대로 된 언론도 없었다. '전원 구조'라는 지상파 언론의 오보를 그대로 믿고 싶었던 우리만이 있었다.
참사를 두고 '살인마', '학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논란이 된 표현들이기도 했다. 사실 '살인마'라는 표현은 2014년 4월 19일 당시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결심한 다음 날, 공권력이 그들의 청와대 행진을 막았던 4월 20일 새벽 가족들의 입에서 나왔다. "정부는 살인마, 아들딸 살려내라!"고 말이다.
'학살'. '고의적 수장'으로 해석될 지경이었던 당시 상황은 '학살'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오직 두 눈으로 보게 된 광경을 통해 얻은 연상이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참사가 일어난 해역의 지점이 손에 잡힐 듯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동거차도. 그곳에 가면 화면의 거리보다 사고 지역이 훨씬 가깝다는 것을 느끼고 제2의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는 섬에서 너무나 가까운, 양식장 주변인데 못 구하다니.' 오죽하면 '안 구한 것이 틀림없다'는 소리마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학살'이란 표현은 여전히 논란인 상태다. 침몰 원인, 구조 방기, 침몰한 세월호. 이에 관한 확인과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가족의 단결된, 역사적인 투쟁과 헌신. 수없이 많은 노란 리본의 물결과 국민적 공감대. 하지만 당시 공중파 방송은 이런 상황을 교묘히 감췄고 심지어 '세월호 피로도' 등에 관해 여론 조작도 이뤄졌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 불과 2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제대로 참사 원인을 알기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정부·여당의 총력적 방어, '인양 무용론'까지
정부·여당은 2014년에 세월호 이슈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총력적으로 방어했다. '유병언 미스터리'가 아마도 '방어의 절정'이었다고 믿는 이도 여전히 많다. 참사 이후 세월호 선원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국정원 지적사항' 문건을 보면,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은 마치 상관과 부하의 관계처럼 수백의 지적사항이 미주알, 고주알 한글 파일에 깨알같이 수록되어 있었다. 댓글을 통한 선거개입도 마다치 않는 충직한 감시자 국정원은 '세월호 실소유주'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가 성역 없는 조사를 막으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 대응방안'이라는 해수부 문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해당 문서에는 'BH'(청와대) 조사 관련 사항은 적극 대응' 등 세월호 특조위 여당 추천 위원에 대한 지침이 담겨 있었다.
2014년 5월, 세월호 가족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외쳤다. 그리고 천만 서명을 호소했다. 수백만의 서명 물결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보상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아니라, 수사권과 기소권까지 담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여론이 일자 정부·여당은 총력을 다해 막기 시작했다.
특검을 대안으로 타협을 종용하던 정부·여당의 압박에 당시 야당은 굴복하고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족은 특검 추천에 관한 가족의 동의권을 끝으로 조사권, 청문회권, 특검요청권을 가진 특별법 입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바로 2014년 11월 7일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비협조권을 발동하며 특조위 구성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는 지난 2015년 1월 16일,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 부대표의 '특조위는 세금도둑'이라는 공개적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특조위는 무려 10개월의 시간을 버렸고, 지난해 하반기에 비로소 제대로 출범할 수 있었다.
특별법 무력화 시도의 절정은 정부시행령의 기습적 예고로 비롯되었다. 이 시행령 때문에 유승민 의원마저도 버림받았다. 상위법의 입법취지를 흔드는 정부시행령의 폐단이야말로 위헌이었기 때문에 유승민 의원은 국회법 개정을 야당과 합의했다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가족과 시민은 분노했고 지난해 4월 16일 1주기에 시행령 폐기 싸움이 더 커졌다. 결국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의 저항으로 총괄권은 조정되었고, 특조위 17명은 간신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장기 말판의 '왕'과 '사'는 건졌지만 정부가 '차', '포', '마', '상', '졸'의 상당수를 빼앗고 차지해버렸다.
당시 정부와 보수진영은 '세월호 인양 무용론'을 흘리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돈이 많이 드니 세월호 인양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김진태뿐만 아니라 보수언론과 정치인은 '세월호 인양 포기론', '무용론'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더 이상 방어가 어려웠던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4월 16일 팽목항에서 '빠른 시일에 선체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참사 1주기 이후 격렬해진 '세월호 지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