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시간] 호박 한 덩이 업은 모과 나무

복효근 시인의 '업다'

등록 2016.04.15 08:38수정 2016.04.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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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
                     복효근

모과나무에 호박이 열렸다
길 잘못 든 호박덩굴이 키 큰 모과나무를 타고 올랐다


까칠까칠한 호박덩굴이 감아 올라와도
모과나무는 둥그런 호박 한 덩이 제 자식인 듯 업고 섰다

미안한 듯 호박은 그것도 꽃이라고 호박꽃 피워 등처럼 내걸었다
모과나무 그늘이 모처럼 환하다

가시나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칡덤불이 아니어서 얼마나 고마운가 하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두런두런 들려오는데

기름한 모과 열매가 호박 흉내를 내는지 모과는 모가 닳아서 모과에 모가 없다

호박엔 모과향도 스며있겠다


나를 업었던 이
내가 업었던 이를 떠올려보는 저물녘

<창작과 비평>2015 겨울호


종종 복효근 시인의 시를 지면에서 만날 때 왠지 따뜻하고 친밀감이 느껴지곤 했다. 올 겨울에 여러 문예지를 훑어보던 중에 시인의 따뜻한 신작시를 만났다. 모과와 호박이라는 낯익은 사물이 빚어내는 따뜻한 울림 혹은 온기가 읽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모과나무는 호박을 제 자식인 양 업고 호박은 환하게 꽃을 피워 모과나무를 밝혀주는 기막힌 풍경을 보여준다. 단순히 풍경의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연의 반전이 화룡점정이다. 이런 반전은 시의 묘미일 뿐 아니라 기본적인 시작 원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밋밋하게 이어지던 시가 이런 한 순간의 반전으로 생기가 돌고 의미가 확장되고 비로소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도 이 마지막 연으로 비로소 한 편의 시로 완성된 경우다.   

시인의 다른 시 한 편 보기로 한다.

'그냥 통을 받치고 젖을 짜려 하면/ 별 소득이 없으므로/ 낙타 주인은 새끼 낙타에게 먼저 젖을 빨게 하다가/ 새끼 낙타를 떼어내고 마저 젖을 짠다// 젖이 돌지 않다가도/ 새끼가 다가가면 유선에 젖이 돌기 때문이다/ 젖을 짜는 동안/ 새끼 낙타를 곁에 세워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를 올려다보는/ 여린 초식동물의 눈망울은 왜 그리 홍그렁 젖어있는지// 그저 풀이 자라서 이 사막에 낙타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안쓰러이 울음 우는 어미 낙타가 있어/ 새끼 낙타의 젖은 눈망울이 있어/ 자갈과 모래뿐인 사막에 젖이 돌고 그나마 풀이 자라는 것이다// (복효근 <젖은 눈망울에 대하여>) 전문 

이 시 역시 마지막 연이 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의미를 확장하고 친근감을 주는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눈물 핑 도는 감동이 솟는 것이다. 자연계의 순수한 모정을 통하여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인간도 어찌 보면 동물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이다. 언어를 사용하고 이성이 있어서 다른 동물과 구별이 되지만 상당부분 동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교육심리학의 조건반사 이론은 개를 실험대상으로 하여 정립된 교육심리학 이론이다. 개에게 사료를 줄 때마다 음악을 들려주면 음식을 주지 않아도 음악만 들으면 침을 흘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 이론이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교육학 이론으로 정립된 걸 보면 인간도 바로 동물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례다. 

세상엔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현상이 무수히 많다. 모과나무를 타고 올라간 호박넝쿨도 그 중에 하나다. 그 현상을 보는 사람, 보고 언어로 옮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로 옮기데 여러 장치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 언어는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집이 된다.

시는 시인이 자기의 존재를 언어로 빚어낸 집이다. 시인의 시를 보고서야 독자는 비로소 감동을 받고 존재하는 현상의 또 다른 의미를 알아차린다. 시는 언어 중에서도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른 언어와 구별된다. 그 감동과 감흥이 바로 시의 효능이고 시의 사회적 기능이 된다.
덧붙이는 글 복효근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마늘 촛불> <따뜻한 외면> 등이 있음

작가의 눈 2013년 19호

전북작가회의 지음,
작가, 2013


#복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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