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는 사이, 아저씨들의 파티가 벌어졌다

[호주 시골 생활 이야기] 일탈이라면 일탈인 작은 파티

등록 2016.04.27 09:59수정 2016.04.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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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정착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베란다에서 보는 석양의 모습
시골에 정착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베란다에서 보는 석양의 모습이강진

아내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 한 달 정도 외국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시드니에 산다면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 밥 동냥도 하면서 나름대로 독신 생활을 꾸려나갈 것이다. 물론 외떨어진 이곳에도 사귄 이웃은 있다. 그러나 아무 때나 찾아가 밥 달라고 할 만큼 친한 사람은 아직 없다.


가까운 이웃으로는 나와 동갑인 스티브가 있다. 호주 내륙, 축산업으로 유명한 스콘(Scone)이라는 동네에서 3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해 은퇴 생활을 하는 이웃이다. 나와는 진한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다. 혼자 살기 어려우니 부인을 일주일만 빌려달라고 했더니 항상 데리고 가라는 농담으로 받아 넘기는 친구다.

매주 월요일은 55세 이상 되는 멤버가 모여 골프를 치는 날. 지난 월요일 골프를 끝내고 스티브와 함께 맥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스티브 아내가 일주일간 친구와 함께 유람선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아내 없이 지내게 됐는데 아시안 국수를 끓여줄 수 있느냐고 스티브가 묻는다. 라면을 한 번 끓여준 적이 있는데 나를 아시안 국수 요리의 대가로 아는 모양이다.

평소에는 집에 사람을 부를 때 아내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다. 술도 한잔 했다. 거리낄 것이 없다. 아시안 국수 먹고 싶은 사람은 우리 집으로 오라고 패기 있게 한마디 한다. 옆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던 이웃도 오겠다고 한다. 남자만 모이기로 했다. 요리는 전혀 못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라면 끓이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

손님 접대에 라면 하나만? 후회가 밀려왔다

잠자리에서 생각하니 너무 오기를 부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온다고 한 사람 중에는 이 동네에서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도 있다. 태국 음식부터 못하는 음식이 없을 정도의 요리사로 소문난 사람이다. 혹시 라면 끓이는 걸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라면 하나만 덩그러니 준비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조금 후회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들이 올 때 같이 준비하자고 하니 흔쾌히 응한다. 의견을 나눈다. 사람 불러 놓고 라면만 내놓기는 그렇다. 가장 쉽게 대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쉬운 방법은 고기 구워 먹는 것이라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 바비큐 싫어하는 호주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이웃이 못 온다는 연락. 별안간 손님이 온다고 한다. 다윈(Darwin)에서 2년 전에 우리 동네에 정착한 동갑내기다. 호주 최북 쪽에 있는 도시라 너무 더워서 시원한 동네를 찾아왔다는 이웃이다. 겉으로는 실망한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쾌재를 부른다.


오늘(4월 25일)은 모이기로 한 날이다. 장을 보러 나간다. 스테이크, 소시지를 산다. 야채가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만들어진 샐러드도 장바구니에 담는다. 양파와 후식으로 먹을 자그마한 케이크도 산다. 대충 준비 끝. 음악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나중에 유튜브에서 골라 들으면 된다. 술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동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자기가 먹을 술은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사람도 있다. 서양 사람에게 조금 어색하지만 신을 벗으라고 요구한다. 베란다에 앉아 신선한 시골 저녁 바람을 맞으며 맥주와 포도주를 마신다. 이웃에 대한 이야기, 동네 개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남자들만의 농담도 나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과 달리 '정치 이야기'는 없다.  

소련군 합창을 아직도 못 잊는 이웃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떠들 수 있는 이웃이 있어 좋다.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떠들 수 있는 이웃이 있어 좋다. 이강진

모두 예순이 넘은, 은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곳 본토박이인 프래드(Fred)는 시간 날 때마다 가지고 있는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간다. 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의 자그마한 나라에서(몇 번 들었지만 나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 호주에 정착한 이고(Igor)는 보석 가공 전문가다. 지금도 아는 사람을 통해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따라서 가끔 일을 하며 용돈을 벌고 있다.

스티브(Steve)는 정원을 잘 가꾼다. 결혼한 딸은 아직도 스콘에 살고 있으며 자주 찾아온다.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물었더니 손자 돌보기가 힘들어 이사 왔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다. 시드니에 사는 내 친구들은 손자 돌보느라 이사 오고 싶어도 못 온다고 하니 특유의 웃음을 짓는다.

스티브가 능숙한 솜씨로 소시지와 스테이크를 요리한다. 나는 잔심부름을 하며 고기 굽는 것을 돕고 식탁 정리를 한다. 이고는 전축을 만지작거리다 소련 합창단의 음악을 크게 튼다. 프래드가 소련이 싫다고 해도 정치와 음악은 별개라며 소련군 합창단(Red Army Choir) 노래에 빠진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음악이 나이 들어서도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머나먼 호주에서 송창식과 최백호의 노래를 찾아 듣는 나를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분 좋게 약간 취한 분위기에 말도 많아진다. 서른이 훌쩍 넘어 이민 온 내게는 영어권 사람들과 마음껏 떠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조금 취해서일까, 나도 말이 많아진다. 평소의 생각을 콩글리시에 신경 쓰지 않으며 열심히 떠드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한국 할머니가 그리스에서 온 할머니와 아침마다 만나 이야기를 나누더라는 이야기,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야기다.

간단하게 끓인 라면을 서투른 젓가락으로 열심히 먹는다. 케이크도 나누며 늦은 밤을 즐긴다. 전혀 다른 삶의 여정을 거쳐 왔건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움을 느낀다.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일까, 아니면 욕심을 버리고 시골로 모인 사람의 만남이라 그럴까.

밤하늘 아래서 조금은 떠들썩한 이 순간이 좋다.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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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바닷가 도시 골드 코스트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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