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건씨11.22사건을 비롯한 국가정보기관의 조작간첩사건을 다룬 <자백>이 상영되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강종건씨.
오소영
고문이 만들어 낸 간첩, "가공인물까지 상상해낼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사건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검찰의 공소 사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인가요?"완전 날조지요. 물론 그때만 해도 한국은 김일성은 가짜고 진짜 김일성은 예전에 죽었다는 식으로 알려졌을 때니까, '일본에서 내가 들은 건 그런 게 아닌데?' 정도의 이야기를 학생들과 몇 번 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누구를 만나서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하고.... 그럴 이유도 없고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 당시 검찰 공소장에는 선생님이 '야마다'라는 동지사 대학 선배에게 간첩교육과 지령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야마다'라는 이름은 제가 만든 거예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을 때 영장 보자고 했더니 '이 자식이? 무슨 영장! 여기가 어딘지 몰라? 넌 현행범이야!'라고 하더군요. 3일 동안 구타하는데 제가 일부러 밥을 안 먹기도 했어요. 배고프면 맞는 게 덜 아플 것 같아서. 잠도 안 재우니까 결국 인정한 것이 '일본에서 학교 선배 만나서 돈 받고 간첩교육 받았다'고 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야마다'인데, 안 맞으려고 만들어 낸 이름이에요. 물론 일본에서 선배들은 만났지만 돈 받고 교육 받은 일은 없어요."
- 당시 한국과 일본의 공안기관이 공조하고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중정에서도 확인을 했을 텐데, 재판 받을 때 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려고는 했죠. 첫 재판 가보니까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어 있어요. 저와 공범이라고 일면식도 없는 한국인 1명과 재일교포 3명이 앉아 있더라고요. 북에 몇 번 갔다 왔다고 하는 주범이라는 사람 밑에 저를 하범(下犯)으로 붙인 거예요. 판사한테 '아무리 그래도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과 재판받아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어요. 검사가 '같은 맥락에서 간첩활동 했다. 공범이다' 그러더군요. 재판하러 가면 방청석 뒤쪽에 고문한 수사관이 앉아서 '부인하면 다시 끌려가서 처음부터 조사받아야 한다'고 협박도 하고..."
- 변호사는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정의감에 넘치는 인권변호사 몇 분이 우리 사건을 맡았는데, 그럴 수 있는 변호사가 몇 명 없었어요. 일본에서 형님이 오셔서 어렵게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이건 내 편이 아니라 완전히 체제 편이에요. 변호사한테 '고문 받았다. 공소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니까 변호사가 '그렇게 한들 아무 소용없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반성하고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해야 동정이라도 얻어서 형을 적게 받는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어요."
- 그래서 변호사가 하자는 대로 하셨습니까? "별 수 없었어요. 최후진술에서 '국내 사람하고 재일동포하고 같은 수준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공교육도 안 받았지만 공산주의 교육받고 그런 지향을 가지고 한 것도 아니다.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만 했어요. 절망감이 들어서 다 포기하고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뭘 항의해 봐야 아무 소용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다른 재일교포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상대해야할 권력은 너무 거대하고, 그 사람들이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다... 물론 고문이나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건 알리려고 노력하긴 했지요. 그렇지만 6개월 동안 가족면회도 안 되고 있었고... 1심 구형 때나 되어서야 형님을 처음 봤으니까..."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교포 2세의 삶강종건씨는 1심에서 7년형을, 항소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를 빌면 가족 품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고국에 유학가면 이런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었을까? 그가 연루된 11.22 사건은 역대 최대 규모지만 그 전에도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71년 서승, 서준식 형제의 간첩단 사건이 터졌고, 1973년에는 최창일 간첩사건이 발표됐다. 1974년에는 고병택, 김영작 간첩사건, 최철교 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진두현 사건, 김달삼 간첩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 선생님이 유학 오시기 전에도 서승, 서준식 형제의 간첩사건 등 재일교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혹시 유학을 오면 이런 일에 연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서승, 서준식 형제 사건은 제가 동지사 대학에 다닐 때 있었던 일이에요. 교포들이 구명활동을 했었고 저도 열심히 참여했었죠. 알고 보니 서준식씨가 내 고등학교 선배더라고. 물론 실제로 만난 건 나중에 감옥살이 할 때지. 어쨌든 서승씨 사건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당시 서울대 유학생이었던 서승은 고문으로 인해 거짓자백을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시도하다 얼굴과 몸에 큰 화상을 입었다-기자 말) 사실 한국에 오기가 무서웠던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내가 재일교포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가 일본에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재일교포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 강종건은 재일교포 2세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 일제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은 문화재가 많아 미국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교토에 다른 동포들과 모여 살았다. 폐품 회수업을 하면서 공장 노동자에게 불법 밀주를 팔기도 하고 돼지도 키웠다. 가난 보다 힘겨운 것은 차별받는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동을 잘했던 '어린 강종건'은 친구들에게 '나는 일본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기도 했다.
그가 민족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역사수업 시간에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민족'이라는 것이 가슴 속에 움텄다. 무엇보다 '우리 말'을 배우고 싶었다. 형들은 고리대금업을 하며 꽤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강종건은 "돈을 갚지 않으면 이불까지 빼앗아야"하는 그 일이 싫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학이다. 일 년 재수 끝에 1970년 교토 동지사 대학에 입학한 강종건은 조선인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고 싶어 법학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물론 귀화하고 변호사가 된 재일교포도 있었지만, '철이 든' 그에게 국적문제는 민족문제였다. 국적포기는 도망이고 회피이자 '민족 허무주의'였다.
"당시에는 박정희가 10월 유신도 했을 때니까 유학을 생각하면 당연히 무서웠지요. 그래도 고국으로 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 달까? 유학가서 변호사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시 일본은 학생운동이 꽤 과격했을 때니까 나도 반독재가 뭔지, 맑스주의가 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데모도 좀 했지만 구경하는 정도였고. 그래서 최소한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고 사법고시도 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 고국에 와서 동포애는 느끼셨습니까?"글쎄요... 한국에서 우리말을 잘 못하는 교포들이 듣는 욕이 있어요. '반쪽바리.'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고 차별받아서 도망 나왔는데... 그래도 여기는 조국인데, 여기서도 욕을 먹고. 내 영혼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있었죠."
- 그래도 다른 교포에 비해서는 말을 잘 하셨던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대학 3학년까지 다니면서 조선문화연구회나 한국문화연구회에서 한국말을 계속 배웠으니까 조금 했지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려니까 교수님 말은 통 못 알아먹겠더라고요. 그래도 일상적으로는 말을 잘하는 편이었어요. 한국 학생들도 인정해 줬고. 그런데 정보기관은 말 잘하면 의심하잖아요? 유학 와서는 데모는 해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야기는 하면 안 되고, 과격 학생들과는 얽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조심했는데 결국 일이 터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