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고 성찰하는 일이 수행입니다
참여사회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부처와 예수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살았을까?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 폭력과 착취를 서슴지 않았던 모순과 부조리를 인류의 성자들도 직시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오감과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 무엇을 보고 들을 때 일정한 감정과 사유를 형성합니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성자들은 한없는 슬픔과 연민으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욕망의 초월과 번뇌로부터 해탈이 세상일에 대한 무관심과 동의어가 아닐진대 성자들의 슬픔은 깊고도 깊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생길에서 지혜와 자비가 동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자비는 연민과 사랑의 접속이고 결속입니다. 사랑의 바탕은 연민입니다.
내 곁에, 내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내 온몸이 그대로 통증입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입니다. <유마경>은 말합니다. "중생의 병은 무지에서 생기고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다" 큰 연민을 가진 보살은 이웃의 고통을 치유하고 해결하고자 큰 뜻을 세웁니다(원력願力). 그리고 그 고통의 실상과 발생의 원인을 파악합니다(지혜智慧). 고통을 해결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합니다(방편方便) 그렇습니다. 아파하는 마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사랑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그래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이 바로 시민의 수행입니다.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자세다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부처와 예수에게 과연 분노가 없었을까? 황당하고 무례한 상상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모든 욕망과 집착을 여의었고 세상 뭇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분들이었으니 어떤 악인에게도 증오와 원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이 살았던 그 시대 또한 신념과 가치가 다르고 이해득실이 얽혀있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투쟁과 차별의 시대였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 앞에 성자들은 담담하고 평온한 마음이었을까요? 증오는 없지만 과연 분노하는 마음은 없었을까요?
다시 <유마경>의 문법으로 생각해 봅니다. "중생의 분노는 정략과 이해에서 생기고 보살의 분노는 정의와 평등에서 생긴다." 그 분노는 정당한 '문제 제기'입니다. 시민의 대승적 수행은 무엇일까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 그름에 대한 단호한 배격,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회복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으며, 그름을 배격하되 마침내 함께 가겠다는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지향과 실천이 시민 수행자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에게 질문하고 성찰하는 일"운동하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심성이 황폐해지고 있는 것 같다." 시민운동하는 분들에게서 많이 듣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저며 옵니다. 고마움에 앞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늘 불공정한 모습들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맞서야 하는 일이 거듭되다 보니 감정이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내가 옳다고 선택한 길이고 좋아서 가고 있는 길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애정과 함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나는 내 일상의 소소한 삶을 재미있고 아름답고 평안하고 가볍고 생기 있게 가꾸어가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 이런 나를 가꾸기 위하여 수행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에게 질문하고 성찰하는 일이 수행입니다. 세간에 살아가는 시민의 수행은 특별한 명상과 기도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언행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수행입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수행은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작은 기쁨을 만들어내고 누리는 일입니다. 당신이 기쁘니 내가 기쁩니까? 그렇다면 내가 기쁘면 당신이 기쁘겠습니다.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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