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김영숙
중구 신포동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대학교까지 나온 이 대표는 지금 살고 있는 성광방앗간 건물을 벗어난 적이 없다.
1층이 방앗간이고, 위층이 살림집인데 태어난 이곳에서 결혼 후에도 방앗간을 운영하며 지금은 성인이 된 딸과 아들을 키웠다.
"1956년에 떡집을 시작했는데 무허가로 한 것까지 치면 1947년부터 이곳에서 방앗간을 시작했어요. 인천에서 태어나신 아버지가 하시던 떡집을 1988년부터 제가 하고 있습니다. 활동을 하려면 먹고 사는 게 해결돼야 합니다. 시인은 먹고 사는 게 해결되지 않지만 떡집아저씨로 살면 해결되죠. 새벽부터 일하면서 점심을 먹고 나면 졸음이 엄습해 와요. 그때 한 시간은 무조건 쉬어요. 그렇지 않으면 글을 못 써요. IMF 금융위기 전에는 직원이 세 명 있었는데 영업이 어려워져 지금은 혼자 운영하죠. 내가 쉴 때는 집사람이 떡집을 봐 줍니다."
이 대표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인천일보>에 '이종복의 인천한담'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13년간 격주로 인천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들로 글을 쓰는데 '같은 주제나 같은 내용이 한 번도 없었다'는 이 대표는 자신이 생각해도 잘했다고 했다. 그걸 묶어 지난해 '인천한담'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을 내고 몇 차례 북콘서트도 열었다.
그밖에도 매주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워싱턴위클리>에도 칼럼을 기고한다. 교민 대상 신문인데 미국에 사는 큰형이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만든 신문이란다. 워싱턴에는 교포 2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 대표는 이들에게 한국인으로 '회귀'를 강요하는 게 아닌,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말아 달라는 취지로 글을 쓴다고 했다. 정기적으로 산문을 쓰는 그는,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은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시는 사람들을 바꿔낼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나의 평생 숙제죠. 시를 쓰는 과정은 도를 닦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은 안 되죠(웃음)."그는 2002년에는 '신포동에서 아침을', 2009년에는 '신포동 그 낯설음에 대한 낯익음'이라는 시집을 냈다.
"관념과 사상에 젖은 시는 영원하지 못해"고등학생 시절부터 시를 써온 이 대표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곰곰이 생각하자 자신이 쓴 시에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대 초에 대학교를 다니면서 부정부패나 군부독재 타도 등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관념적 시를 쓰고 있었어요. 사상의 노예가 된 듯했죠. 진보를 자처하면서 관념화라는 늪에 빠져 문학이 제대로 안 보였던 거죠.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을 시로 쓰려고 해도 뭔가 깊이도 없고 말을 만드는 느낌이었어요."그러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구연 시인을 만났다. 쓴 시를 갖고 오라 길래, 김 시인에게 보여줬더니 조목조목 '씹어'주는데 죽을 맛이었단다.
"김 시인이 제 정체성을 묻더라고요. '관념이나 사상에 젖어 쓴 시는 영원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셔서, 내가 살고 있는 신포동과 시장에 대해 시를 썼죠. 그때부터 나고 자란 이 동네를 시로 쓰는데 쓰려고 하니까 인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인천을 공부해야겠다고 시작한 게 인천의 역사를 섭렵하게 돼 지금은 인천에 대해 이것저것 강의도 할 수 있는 강사가 됐습니다. 진짜 시는 내 삶의 근저에서 샘물을 떠먹는 순간인 거죠. 평범하고 쉬운 게 진짜 시라고 생각합니다."두 마리 토끼, 시와 역사를 잡다이 대표는 '인천의 역사를 섭렵하는 순간 두 마리 토끼가 찾아왔다'고 표현했다. 두 마리는 시와 역사다.
인천을 공부하려 했지만 관련 책이 턱없이 부족했다. 책과 자료를 찾다보니 중국어나 일어, 영어로 된 것들이었고, 정보의 제한으로 자료가 부족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인천을 연구한 논문이 있었지만 인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 대표는 인천을 새롭게 발굴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인천의 역사에 대한 책이나 자료집을 7권 펴냈다.
대학 때 법학을 전공한 이 대표는 어릴 때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달달' 외웠다. 1990년에 대건고등학교 CA(특별)활동시간에 풍물이나 한자를 가르치는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애들을 만나면서 이 친구들을 제대로 '인천 놈'으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황금가지'입니다. 인천의 역사나 문화, 예술 활동을 지역사회와 접목하려고 했습니다. 황금가지에서 매해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행사를 했는데, 인천 최초였죠."이 대표는 1996년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를 만들었다. 같은 해 '개항장역사문화연구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당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인천 개항장 주변의 역사문화유산을 기록하고, 답사코스를 만들었다.
그러한 활동을 모아 2005년에 화도진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사진들에 해설을 붙여 '사진으로 보는 인천 한 세기'를 출간했고 2007년엔 '길 따라 건물 따라'라는 답사 안내책자를 내기도 했다.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라는 단체이름의 뜻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터진개'는 신포동의 옛 이름이고, '황금가지'는 영국의 민속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프레이저의 저서다.
"'황금가지'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오래된 뿌리나 연원을 말하는 상징언어입니다. 황금가지라고 하는 황금나무는 나무 존재 자체로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가지를 펼치고 열매를 맺어요. 문화마당이 황금나무나 황금열매가 아닌 '가지'로 통로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통로의 역할을 하겠다는 황금가지는 매해 정월대보름날 신포시장 입구에서 '터진개 지신밟기'를 했으며 1999년부터는 '인천장정'이라는 답사프로그램을 하기도 했다.
'인천을 제대로 알자'는 취지로 진행한 이 프로그램은 인천의 바다와 사라진 하천, 인물, 근대 건축물이나 인천의 산 등을 답사하며 개항 도시 인천의 역사성과 참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또한 인천역 인근의 근대 유적과 건축물을 돌아보는 '개항장 거북이 마라톤'도 진행했다.
짬뽕 같은 도시, 인천의 이야기를 담은 '인천짬뽕' 출간 예정'인천은 짬뽕 같은 도시다. 짬뽕처럼 섞였고, 다시 짬뽕으로 섞여 살 수 있고, 독특한 짬뽕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지난해 출간한 이 대표의 저서 '인천한담'의 일부다.
"짬뽕은 여러 가지 섞여있는 음식이지만, 저는 미완의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인천도 마찬가지죠.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인천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데 인천 토박이로서 인천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조화롭게 섞이면서도 진정성을 갖고 외지인들을 보살피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인천이란 동네는 복잡한 잡종의 도시지만 그것이 인천의 에너지가 되고, 포용력을 갖춘 도시라 생각합니다."2011년부터 '인천짬뽕'이라는 가제로 인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이 대표는 올해 이 이야기를 마무리해 출간할 예정이다.
떡집만 운영하기에도 벅차 보이는 이 대표에게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물으니, 인천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단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빠르게 정착하고 인천의 매력에 빠져서 의미 있게 경제행위를 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축적해온 지식들을 전달하면서 재창조하고 싶어요. 그들이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지금 인천의 재창조나 가치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게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재교육되지 않으면 단편적인 지식 전달밖에 안 되죠.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새겨 어떤 미래를 바라보며 실천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20대 후반 나이에 교사로 일하는 딸이나 20대 중반인 대학생 아들이나 모두 떡집을 하고 싶어 한단다. 대가 끊길까 속으로 걱정했던 게 무색했다. 그러면서 궁금했다. 떡집을 운영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내가 하는 일이 재밌어 보이나 봐요. 과외를 시키지는 않았지만 떡집을 하면서 돈을 벌어 학교를 보내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게 도와주니까, 아버지의 일이 완벽해 보였겠죠. 나는 힘들어죽겠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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