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희훈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 촛불이 하나둘 켜졌다. 길을 가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촛불을 들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돌아가며 한국 사회에 넓게 퍼진 여성 혐오·차별을 고발했다.
17일 새벽에 벌어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사건이 여성 혐오에 따른 범죄인 것으로 알려진 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쪽지가 나붙고 국화가 쌓였다. 이곳은 어느새 거대한 '추모의 벽'으로 변했다.
추모를 넘어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여성 혐오·차별의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날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 역시 이 같이 외쳤다.
"어쩌면 나는 간신히 살아남았다"자신을 스물세 살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사건을 다룬 기사를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은 '강남역 10번 출구는 정말 번화한 곳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였다, 이후 피해자를 조롱하며 '잘됐다'라고 쓴 기사 댓글을 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여성이 당하는 성희롱·성폭력은 빈번하고 흔한 경험"이라고 토로했다.
김정민(22)씨는 "어젯밤에 나 역시 강남역에 있었다,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혐오범죄이기 때문에 그냥 길가다 여자로 태어난 게 재수 없어서 온몸을 칼로 난자당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오원춘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멀쩡히 잘 살다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여자인 게 재수 없어서 토막살인을 당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성 살인 사건이나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이나 트렁크 살인사건 같은 걸 볼 때마다, 나는 여자라서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녀'라는 낙인과 함께 죽음마저 조롱당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저절로 깨달았다." 그는 "이번 참사로 인해 여성혐오범죄에 대해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만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늦었다"면서 "이제야 묻지마 살인이라는 워딩이 너무나도 손쉽게 젠더폭력을 은폐했다는 것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어쩌면 나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존엄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멸시, 혐오, 비하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서 "여성으로서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존엄하고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 20대 여성은 피의자를 두고 목사를 꿈꾼 청년이라고 소개한 기사를 비판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내 꿈이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녀'가 될 것이다, 화장실에서 죽었다고 어떻게 '화장실녀'라고 할 수 있느냐"면서 "정말로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피해자다,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이번 사건의 공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