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가 놓친 윤동주의 벗 강처중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22] 종로구 누상동

등록 2016.05.24 18:45수정 2016.05.2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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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하숙집이 있던 자리에 재건축된 2층 슬라브주택
윤동주 하숙집이 있던 자리에 재건축된 2층 슬라브주택유영호

박노수가옥을 나와 조금 걸으니 이내 100미터도 안 되는 곳의 연립주택담장에 그곳이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종로구 누상동 9번지)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본래의 집은 헐리고 지금은 2층 다세대주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본래 윤동주가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윤동주가 1941년 하숙하였고, 이곳에서 <별 헤는 밤> <자화상>(1939) 그리고 <또다른 고향>(1941.9) 등 그의 대표작들이 창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곳 종로구 누상동에 잠시 머문 윤동주의 영향력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12년 창의문 앞에 '윤동주문학관'까지 건립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윤동주와 종로구 누상동의 인연

 윤동주가 머물렀던 하숙집(왼쪽 한옥)이 헐리기 전 1970년대의 모습
윤동주가 머물렀던 하숙집(왼쪽 한옥)이 헐리기 전 1970년대의 모습유영호

 2012년 종로구 청운동에 새로 조성된 윤동주문학관
2012년 종로구 청운동에 새로 조성된 윤동주문학관유영호

윤동주는 1941년 5월 연희전문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집을 찾다 이 집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요시찰인물이었던 김송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그해 9월까지 잠시 머문 것이 전부다.

거기에 여름 방학 때 만주에 갔다 온 것까지 치면 윤동주가 이곳 누상동에 머문 것은 무척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종로구에서는 이곳 옥류동천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졸지에 윤동주는 이곳 토박이처렴 대접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윤동주 시집에 있는 시 가운데 몇 편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으니 문학인으로서 이곳과의 인연을 무작정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곳 역시 윤동주가 거쳐간 곳이니 그에 대하여 좀더 깊이 알아보도록 하자. 당시 태평양전쟁의 개시로 조선은 전시체제로 전환되었고 이로 인해 학제 단축으로 윤동주는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을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수기로 시집 3부를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나머지 2부를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 후배에게 증정했다.


본래 이 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으나 '서시'를 쓴 후 명칭을 바꾼 것이다. '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시집이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은 옥사하면서 없어졌고, 이양하 교수에게 건넨 시집 역시 행방불명이되었다. 하지만 후배 정병욱에게 건넨 것은 그가 징병에 끌려가면서도 고향집 어머니에게 부탁해 보관되어 훗날 윤동주는 그가 남긴 시로 우리에게 되살아난 것이다.

 윤동주 '서시'의 육필 원고 '1941.11.20'이라고 그 창작시기가 명확히 적혀 있다.
윤동주 '서시'의 육필 원고 '1941.11.20'이라고 그 창작시기가 명확히 적혀 있다.윤동주 서시

분단으로 지워진 시집 발간자 강처중의 발문


윤동주의 시집발간에 후배 정병욱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벗 강처중의 역할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지고 있다. 윤동주 시집과 강처중의 이야기는 우리의 분단모순이 우정을 어떻게 갈라 놓았는가를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니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이곳을 떠나도록 하자.

 1968년 세워진 '윤동주시비'와 그 뒤에 그가 연희전문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핀슨홀'
1968년 세워진 '윤동주시비'와 그 뒤에 그가 연희전문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핀슨홀'유영호

 핀슨홀 입구 벽면에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부조물
핀슨홀 입구 벽면에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부조물유영호

윤동주가 연희전문시절 함께 기숙사 핀슨홀에서 생활했던 일명 '핀슨홀 3총사'가 있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와 강처중이 모두 같은 해 입학한 친구다. 그리고 2년후 후배 정병욱이 입학하면서 넷은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윤동주는 도쿄 릿교대학으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윤동주는 한 학기를 마치고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재입학 하였다. 송몽규가 교토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아마 백석과 그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의 숨결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하지만 송몽규가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이란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어서 윤동주 역시 체포되고 만다. 특별히 조직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의 체포는 사회활동이 왕성했던 송몽규와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둘은 혈연적 관계는 물론 어릴 때부터 일본 유학까지 항상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후 윤동주가 먼저 사망하였고, 윤동주 죽음이 생체실험이었던 것 같다는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이 역시 송몽규이다. 그 역시 같은 실험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몽규 역시 윤동주 사후 3주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겪고 불과 6개월 뒤 해방은 되었지만 정신없이 보내다 1947년 2월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중지를 모았다. 이 일을 강처중이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쓰인 열아홉 편의 시와 일본유학 시절 강처중에게 보낸 다섯 편의 시 등 총 서른 한 편의 시가 하나로 묶여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초판에 정지용이 서문을 쓰고, 강처중이 발문을 달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과 글은 그 후 10년 뒤 증보판을 내면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역사가란 사실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워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증보판을 낸 시기는 이미 전쟁이 끝나고 38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고, 남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던 때이다. 따라서 월북한 정지용과 해방 전후언론계의 남로당 거물이었던 강처중의 이름은 지워진 채 윤동주만 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재판본에서 삭제된 글의 주인공 정지용(좌)과 강처중
윤동주 유고시집 재판본에서 삭제된 글의 주인공 정지용(좌)과 강처중유영호

최근 영화 <동주>(2016, 이준익 감독)가 상영되면서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벗인 송몽규에 대하여 널리 알려졌다. 영화의 특성상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은 송몽규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조연으로 처리된 강처중의 존재 역시 윤동주에게는 커다란 부분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청춘으로 죽어간 윤동주의 삶을 알려주고 간 사람이다. 따라서 강처중의 존재와 함께 볼 때 윤동주는 완성되는 것이기에 분단으로 잘려져 나간 그의 '발문'을 아래 남겨본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까이든 아모런 때 아모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 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듯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그 소리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 소리! 일본 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소리에 느낀 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로서 아조 가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獄死)하니 그도 재사(才士)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지려 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 강처중
#윤동주 #윤동주하숙집 #서촌기행 #강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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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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