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슨홀 입구 벽면에 윤동주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부조물
유영호
윤동주가 연희전문시절 함께 기숙사 핀슨홀에서 생활했던 일명 '핀슨홀 3총사'가 있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와 강처중이 모두 같은 해 입학한 친구다. 그리고 2년후 후배 정병욱이 입학하면서 넷은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윤동주는 도쿄 릿교대학으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후 윤동주는 한 학기를 마치고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로 재입학 하였다. 송몽규가 교토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아마 백석과 그가 가장 존경했던 정지용의 숨결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하지만 송몽규가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이란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어서 윤동주 역시 체포되고 만다. 특별히 조직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의 체포는 사회활동이 왕성했던 송몽규와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둘은 혈연적 관계는 물론 어릴 때부터 일본 유학까지 항상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후 윤동주가 먼저 사망하였고, 윤동주 죽음이 생체실험이었던 것 같다는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이 역시 송몽규이다. 그 역시 같은 실험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몽규 역시 윤동주 사후 3주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겪고 불과 6개월 뒤 해방은 되었지만 정신없이 보내다 1947년 2월 윤동주 사망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를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에 중지를 모았다. 이 일을 강처중이 도맡아 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쓰인 열아홉 편의 시와 일본유학 시절 강처중에게 보낸 다섯 편의 시 등 총 서른 한 편의 시가 하나로 묶여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초판에 정지용이 서문을 쓰고, 강처중이 발문을 달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름과 글은 그 후 10년 뒤 증보판을 내면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역사가란 사실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워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증보판을 낸 시기는 이미 전쟁이 끝나고 38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바뀌었고, 남북이 서로를 적대시하던 때이다. 따라서 월북한 정지용과 해방 전후언론계의 남로당 거물이었던 강처중의 이름은 지워진 채 윤동주만 홀로 우리에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