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아들 죽고... '훌륭했던' 황제의 비참한 말년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④] 무릉과 박물관

등록 2016.05.27 11:08수정 2016.05.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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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에 따른 갱도
무릉에 따른 갱도이상기

전시실로 들어서면 먼저 무릉에 딸린 갱도를 발굴한 사진이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유물뿐 아니라 수많은 유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대부분 동물들의 뼈로 한나라 때 순장 풍습을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시황 이후 사람을 함께 묻는 일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시종과 병사를 작은 인형 형태로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이곳 전시실에도 이러한 도용(陶俑)을 여럿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도용이 진시황 병마용갱처럼 크거나 사실적이지 않다. 정말로 무덤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병마보다는 시종들이 많다. 이들 도용 역시 채색되어 있었으나, 그 색이 많이 바랬다. 그리고 팔이나 손목이 훼손된 것이 여럿 보인다. 이들 도용은 후대의 당나라 것에 비해서도 형태나 채색 등에서 예술성이 떨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중국 고대 도용은 진나라에서 시작해 당나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한나라 시대 도용
한나라 시대 도용이상기

 소, 돼지, 닭
소, 돼지, 닭이상기

환관과 시녀 도용도 보인다. 이들은 차렷 자세를 하고 있어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또 도포 형식의 옷을 입고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춘 도용도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긴 치마를 입고 춤추는 무희들을 바라보는 관리를 그린 채색화도 보인다. 여기에서 무희들은 날렵하게, 관리들은 풍성하게 그려졌다. 우리는 이러한 한나라 시대 도용을 함양박물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도용은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도 많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동물이 이곳에 있다. 개, 돼지, 소, 쥐, 원숭이, 곰, 양, 고양이, 닭, 오리, 기러기, 올빼미, 매 등이 보인다. 이들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지 않아 소박한 느낌이 든다. 그중 원숭이는 암컷인지 두 마리 새끼 중 하나를 등에 업고, 또 다른 한 마리를 가슴에 안은 형상이다. 쥐는 먹이를 입에 물고 있다.

 유금마
유금마이상기

 청동제 누호
청동제 누호이상기

이곳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유물은 금은과 청동기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큰 동물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청동에 금도금을 해 만든 유금마(鎏金馬)가 가장 눈에 띈다. 이 말은 한 번 달리면 천리를 가고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를 표현한 것 같다. 이것은 역사적, 미학적 가치가 있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다 섬서역사박물관으로 옮겨간 금은 죽절문(竹節紋) 향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하단부 받침이 죽절문이고, 상단부가 박산형(博山形) 향로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부가 백제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요소가 있다. 이것 역시 국보다.

청동기 유물 중에는 술잔, 향로, 솥, 항아리, 시루, 등잔, 동경 등 제기와 생활용품이 많다. 그중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것은 청동으로 몸체를 만들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을 한 코뿔소 술잔(錯金銀銅犀尊)이다. 1963년 흥평현 마두촌에서 발견된 것으로, 서한시대 청동기 유물 중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이것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술잔과 향로, 솥과 항아리, 등잔, 동경 등은 실제 사용했다기보다, 묘에 넣는 부장품인 경우가 많다. 청동 향로 중에는 받침대가 쟁반형이고, 상단부가 박산형인 경우도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상단부 위쪽으로 손잡이 형태의 새를 만들어 달았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유물은 청동제 누호(銅漏壺)다. 누호는 일종의 물시계로, 물을 담은 통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한 다음, 부표의 눈금을 읽어 시간을 측정하도록 했다. 그 외 생활용품으로 동경과 등잔이 있고, 무기로 화살촉과 노(弩)가 있다.

정치도 잘했지만 문장에도 능했던 한무제


 한무제 무릉
한무제 무릉이상기

무릉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서쪽으로 1㎞ 쯤 떨어져 있는 무릉으로 간다. 길가에서 대진고도(大秦古都) 덕선함양(德善咸陽)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위대한 진나라의 옛적 수도, 덕과 선으로 가득한 함양'이라는 뜻이다. 무릉 입구에는 한무제 무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입장권이 무릉과 무릉박물관 통합권이어서 입장료를 별도로 내지 않는다. 정문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산이 우뚝하게 나타난다.

산쪽으로 올라가는 길 가운데 1962년 섬서성 인민위원회에서 세운 무릉 표지석이 서 있다. 이것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1963년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에서 또 다시 세운 지붕이 있는 묘비가 있다. 이곳에는 '무릉 한무제 유철지묘(劉徹之墓)'라는 묘표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다시 잔디를 지나 묘로 접근하면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76년(丙申)에 세운 한효무제(漢孝武帝) 무릉이라는 묘비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묘비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무릉에서의 단체 사진
무릉에서의 단체 사진이상기

한무제릉에는 올라갈 수 없어 우리는 단체사진을 찍고, 무제의 업적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무제(기원전 156~87)는 기원전 141년 한나라의 제7대 황제로 등극한다. 그의 나이 16세 때다. 당시 그는 할머니 두황태후(竇皇太后, 기원전 ?~135)의 수렴청정을 받는 처지였다. 두황태후는 도교를 숭상했고, 정치에 있어서도 황실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는 통치방식(無爲而治)을 취했다. 한무제가 독자적인 정책을 취한 것은 황태후가 죽은 기원전 135년 이후다.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도 흉노를 토벌하는 과감한 정책을 폈다. 경제적으로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동전을 만들어 경제를 개혁하고, 염철(鹽鐵)의 전매를 통해 국고를 튼튼히 했다. 문화적으로는 유학을 존중하고, 성품과 학문 모두 우수한 인재인 현량(賢良)을 중용했다.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동중서(董仲舒)였다. 그리고 그의 건의로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립해 인재를 육성했다. 그 결과 무제 때 한나라는 민생과 경제, 외교와 국방, 문화와 학문에서 절정기에 이를 수 있었다.

 한무제 유철 초상
한무제 유철 초상이상기

한무제는 또한 문장에도 능해 스스로 사(辭)와 부(賦)를 지은 시인이었다. 그중 <추풍사(秋風辭)>와 <도이부인부(悼李夫人賦)>가 유명하다. <추풍사>는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감회를, <도이부인부>는 죽은 아내 이부인에 대한 그리움과 애도를 노래했다. <추풍사>는 기원전 113년 한무제가 하동군(河東郡) 분양(汾陽)에 가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부른 노래다.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가을바람 부니 흰 구름 날고                                    秋風起兮白雲飛
초목이 누렇게 변하니 기러기 남으로 돌아간다.       草木黃落兮雁南歸
난초 빼어나고 국화 향기로웠건만                           蘭有秀兮菊有芳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워서 잊을 수가 없구나.           懷佳人兮不能忘
누선(樓船)을 띄워 분하(汾河)를 건널 제                 泛樓船兮濟汾河
강물 가로질러 흰 물결 일으키네.                            橫中流兮揚素波
피리 불고 북을 치며 뱃노래를 부르니                      簫鼓鳴兮發棹歌
환락이 극에 달하면서도 슬픈 정이 많아지네.           歡樂極兮哀情多
젊고 건장한 때 다 지나고 늙어감을 어이하리.          少壯幾時兮奈老何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청나라 때 세운 한무제 묘비
청나라 때 세운 한무제 묘비이상기

대내외적으로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무제도 관점에 따라서는 잘못을 저지른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무제의 다섯 가지 실책(五失)이라고 부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흉노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고, 사회가 뒤숭숭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말년에 불노장생이라는 삿된 생각에 빠져 무당과 주술에 탐익했다. 그는 진시황제와 마찬가지로 불노장생의 신약을 구하기 위해 봉래선인(蓬萊仙人)과 신군(神君)에 의지했다.

또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기원전 195~108)을 정벌한 것도 무제에게는 커다란 실수였다. 왜냐하면 거짓 정보를 받고 출병해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의 군대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했지만, 적국의 장수를 매수하는 비열한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후 논공행상에서도 전쟁을 이끈 장수들을 처형하거나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면서 투항한 조선의 관리를 한사군 제후로 임명했다고 한다.

기원전 91년에 발생한 무고지화(巫蠱之禍)도 무제의 통치시기에 발생한 커다란 실책이다. 무고지화는 황제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무고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인 동란이다. 이 때문에 황후, 태자, 승상과 신하들이 죽음을 당했다. 한무제에게는 위황후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태자 유거(劉據, 기원전 128~91)가 있었다. 무제가 태자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음을 불만스럽게 여기던 차에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태자를 무고한다.

이에 태자 유거는 강충을 죽이고, 장락궁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안 서쪽으로 80㎞ 떨어진 감천궁에 가 있던 무제는 명령을 내려 반란을 진압하도록 한다. 태자 유거는 호현(湖縣)으로 피신해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유거의 어머니 위황후도 아들의 모반에 책임지고 폐위되었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유거가 강충의 무고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음을 나중에 안 무제는 통탄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무제 말년 한나라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무릉박물관 #도용 #금은청동기 #무제의 무릉 #무고지화(巫蠱之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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