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해결'이 아닌 '은폐'를 택했을까

유엔이 살펴보아야 할 인권침해 :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등록 2016.06.01 19:22수정 2016.07.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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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하 실무그룹)'이 지난 5월 23일부터 9일간 한국에 있습니다.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이하, 이행원칙)'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실무그룹'과 '이행원칙'의 의미, 배경 등에 관하여는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사무국장의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도 실무그룹을 만나. '삼성전자 반도체ㆍLCD 공장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를 알렸습니다. 이 문제의 올바른 해결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유엔이 만든 이행원칙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9년간의 싸움, 그리고 삼성의 계속되는 책임 회피

a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농성중인 반올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농성중인 반올림. ⓒ 반올림


이 문제는 2007년 3월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까지 시민단체 '반올림'에 제보된 피해자의 수는 223명이고 그 중 76명은 이미 사망하였습니다. 공장 내부에 대한 외부 전문기관의 진단과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법원의 산재인정 판결 등을 통해, 삼성의 안전보건 관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9년간 반올림을 비롯한 국내ㆍ외 시민사회는 삼성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왔습니다. 2012년에는 전 세계 네티즌들이 참여한 최악의 기업 선정 투표에서 삼성전자가 3위에 오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어떠한 잘못도 인정하지 않은 채,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만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삼성전자의 일관된 주장은 "우리 반도체 생산라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 전문기관이 공장 내부의 위험성을 진단한 보고서들(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 보고서, 2013년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 등)은 "영업비밀"이라며 은폐하고 있습니다.

소속 노동자의 산재인정을 방해하는 행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산재소송 과정에서 법원이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여도, 삼성은 "영업비밀이다.",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해 왔습니다. 심지어 '노동자에 대한 보호구 지급 현황', '사업장 내 재해 발생 현황' 등도 "영업비밀"이라고 합니다.


산재보상 신청이 접수되면 정부(근로복지공단)가 공장에 대한 현장 조사를 실시하는데, 삼성은 그 조사에 노동자의 대리인(노무사, 변호사)은 참여하지 못하게 합니다. 공정한 조사가 이뤄질 수가 없는 환경입니다. 직업병 피해가족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산재소송 포기', '시민단체와 만나지 말 것' 등을 조건으로 합의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병원비로 어려움을 겪던 어느 유족은 삼성의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며 산재소송을 취하한 후, 언론에 그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삼성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점점 거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다룬 책과 연극, 영화도 나왔습니다. 결국 삼성은 반올림에 대화 제안을 하였고, 2013년 12월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양자 간의 교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전 실무협상을 통해 교섭 의제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로 정했습니다. 2014년 12월부터는 교섭 주체 간의 합의에 따라, 3인의 조정위원들이 주도하는 조정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7월에 '조정권고안'이 발표되자, 삼성전자는 돌연 조정 '보류'를 요청하더니, 그 해  9월부터 자체적이고 한시적인 보상ㆍ사과를 강행하였습니다. 사과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물론 보상대상 심사, 보상액 산정까지 모두 삼성이 직접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보상에 관한 세부 기준과 보상의 집행 내역 등은 모두 은폐되고 말았습니다.

2016년 1월 12일, 조정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위와 같은 경과를 설명하며 '삼성의 보상절차는 조정권고안의 내용과 다르다'는 점과 '보상ㆍ사과에 관해서는 논의가 보류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14일), 삼성전자는 전혀 다른 내용의 보도 자료를 배포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보상은 "조정권고안의 원칙과 기준에 기초한" 것이며, 그로써 "백혈병 이슈가 9년 만에 해결"되었고 "조정의 3대 쟁점도 모두 해결"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제 '해결'이 아닌 '은폐'를 택한 삼성, 그리고 문제를 방치하는 정부

삼성은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과와 보상으로 이 문제를 덮으려 합니다. 문제의 올바른 '해결'이 아닌 '은폐'를 택한 것입니다. 황상기(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김시녀(삼성LCD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씨의 어머니)씨 등 직업병 피해가족들과 '반올림'은 삼성의 그러한 태도에 항의하며, 8개월 가까이 삼성 서초사옥 앞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부의 잘못도 큽니다. 국내에 반도체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인데, 정부가 공장 내부의 위험성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의 일입니다. 반올림이 오래 전부터 요구해온 반도체 '뇌종양' 피해에 대한 집단 역학조사와 'LCD' 공장에 대한 유해요인 조사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직 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산재보상을 받으려면 재해노동자 스스로 질병의 업무관련성을 밝혀내야 하는 '입증책임'의 문제도 여전합니다. 입증책임을 전환 내지 분배하는 취지의 산재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국회에서 논의되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2012년 입증책임의 전환을 권고한 바 있지만, 번번이 노동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고용노동부는 산재 심사나 소송 과정에서 회사가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거의 모든 자료를 '비공개' 대상으로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정부가 사실상 회사의 산재은폐에 적극 협조해 온 것입니다.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의 대표적 위반 사례,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

이행원칙에 따르면, 기업은 자신들의 활동 범위 내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충분하고 상세한 조치를 취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핸드폰 부품의 원료인 광물을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서 구입한다고 합시다. 내전의 한 축인 군벌이 무기구입 자금 확보를 위해 광물을 판매한다면 광물 구입 자체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실제 아프리카에서 많은 아동들이 광물 생산에 투입되고 있기도 합니다.

삼성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 요소를 사전에 제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행원칙은 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공장에서 뿐 아니라 국내ㆍ외 하청 업체들에 대해서도 노동권을 비롯한 인권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Due Diligence)를 기울일 것을 요구합니다. 베트남,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삼성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건강상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충분한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삼성에게 있는 것입니다.

유엔에서 이행 원칙이 통과된 이후, 유엔의 다양한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는 특별보고관(Special Rapporteur)들도 기업의 인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작년 10월에 한국을 공식 방문한 '유해물질 특별보고관'도 반올림 농성장을 방문하여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였고, 이번에 방문한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삼성전자도 기업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전자산업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협의체인 '전자산업 시민연대'(EICC, Electronic Industry Citizenship Coalition, http://www.eiccoalition.org)에 가입하여, 스스로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하지만 EICC의 행동강령이 요구하는 노동ㆍ환경ㆍ윤리에 관한 원칙들을 삼성은 제대로 이행하고 있을까요? 최근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휴대폰 부품을 생산하다 실명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의 사례( 관련기사: 세월호, 메르스, 메탄올... 이곳은 여전히 위험하다)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기업에 의한 인권침해를 예방하고자 국제 사회가 정한 여러 원칙들은 한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무시 내지 위반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직업병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방한한 유엔 실무그룹이 이러한 문제 상황을 제대로 알고, 한국정부와 기업에게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권고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삼성 반도체 #유엔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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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는 2000년 창립이래로 인권과 평화에 기반을 둔 국제연대 사업을 통해 해외한국기업감시 및 민주주의와 인권연대활동,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감시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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