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낯선 환대에서 오렌지를 본다

삼성 백혈병 투쟁에 함께했던 고 엄명환씨 1주기에 보내는 편지

등록 2016.06.01 18:37수정 2016.06.0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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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앞이 낯설다. 갈 PC방도 없거니와 뻔질나게 써대던 성명서 쓸 일도 없는 곳에 살다보니 하얀 모니터 화면이 참 낯설다. 낯선 게 어디 컴퓨터 화면뿐이랴. 거짓말처럼 오렌지가 하늘로 간 후 거짓말처럼 남해로 내려오니, 모든 게 낯설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 들어와 무작정 마을 이장님을 찾아뵙고, '방 하나 구해달라'고 떼쓰는 용기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가을부터 겨울까지 논이며 밭이며 불려 다녔다. 허리가 아프고, 손모가지가 쑤셨다. 왜 시골 할머니들은 죄다 허리가 굽으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우연히 월세집을 구하고, 또 우연히 일자리를 구했다. 물론 시급 6030원짜리 비정규직이다.

그렇게 오렌지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녀석도 낯설었겠지만 나 역시 오렌지가 낯설었다. 누구보다 더 낯선 이들이 오는 것을 좋아하고 환대해야 하는 활동가였지만, 솔직히 누구보다 더 낯선 이들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었다. 그 거리를 좁힌 것은 내가 아니라 오렌지였다.

수다스럽진 않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항상 물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해야 했다. 걸핏하면 약속 시간을 어기고, 의욕만 앞서 결과가 좋지 않을 땐 험한 소리도 자주 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언제 저승갈지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그리 열심히 살았나 싶다.

낯선 남해로 내려왔다.  2016년을 다시 시금치로 시작한다. 근 한달을 피해다녔으나  더 이상 숨을 곳이 읍다. 즐기자. ㅋㅋ - 허기저(안병주) 님의 페이스 북 글
낯선 남해로 내려왔다. 2016년을 다시 시금치로 시작한다. 근 한달을 피해다녔으나 더 이상 숨을 곳이 읍다. 즐기자. ㅋㅋ - 허기저(안병주) 님의 페이스 북 글안병주

이곳 남해에서는 내가 낯선 사람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만 선뜻 말을 건네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눈빛들이 영 부담스럽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하면 그제야 '어데서 왔능가' 묻는다. 이웃 할머니는 '젊은 사람이 사업 실패할 수도 있지!' 하시면서 '여기서도 먹고 살 만하니 열심히 살라'는 위로 아닌 위로도 건넨다.

이런 대화는 웃음으로 퉁 치지만, 밭일 조금 도와 드리고 얻어먹는 고봉밥과 술은 웃음은커녕 집에 와 배를 움켜쥐기 일쑤다. 이른 아침, 문 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면 무가 쌓여 있고, 일 갔다 들어오면 반찬거리가 덩그러니 툇마루에 놓여 있다. 익명의 환대가 아직은 낯설다.

시골살이가 기분 좋은 환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계의 눈빛은 여전하고, 서로를 헐뜯는 말들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생존의 전장에서 다른 이의 이득은 자신의 불이익으로 여긴다. 시금치 경매장에서의 자리싸움은 도리어 귀엽게 느껴진다.


중학교가 공부 안 시키는 학교로 바뀌었다며, 먼 곳으로 전학을 시킨다. 험한 뱃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친 이주여성들 소식도 간간이 들린다. 이곳도 삶은 경쟁이고, 낯선 이들에 대한 불신이 많다. 환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직 텁텁하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오렌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오렌지가 아니라 낯선 오렌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쓰러진 지 일주일, 이건희가 썼다던 그 비싼 장비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오렌지는 낯설었다. 기계가 숨을 쉬는 건지 사람이 숨을 쉬는 건지 '쉬익 쉬익' 소리로 아직은 살아 있구나, 싶었다.


다시 일어나면 잘 해줄 거라 헛된 다짐만 몇 번을 했다. 결국 오렌지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익숙한 자신보다는 낯선 이들에게, 지금 살아 숨 쉬는 낯선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라며 가버렸다. 오렌지가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고 싶은 것들이 사회에서 낯선 사람 취급받는 사람들이었기에 더 그렇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오렌지 덕분에 돌아본다.

6월 10일, 오렌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오렌지가 하늘로 가기 전 나에게 준, 익숙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낯선 오렌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오렌지가 낯설다. 금방이라도  카메라 들이대고  튀어나올 것 같은데 그냥 웃고만 있다. 좋은가부다. 향냄새가 좋구나.잘자라. - 2015.6.11 오렌지가 떠난 다음날 페이스 북에 쓴 허기저(안병주)님 글
오렌지가 낯설다.금방이라도 카메라 들이대고 튀어나올 것 같은데 그냥 웃고만 있다. 좋은가부다. 향냄새가 좋구나.잘자라. - 2015.6.11 오렌지가 떠난 다음날 페이스 북에 쓴 허기저(안병주)님 글안병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렌지가 좋아(고 엄명환)님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쓴 글 중 하나입니다. 오렌지는 반올림, 다산인권센터, 비주류 사진관, 골몰잡지 사이다 등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6월 10일에는 인권재단 사람 오렌지 기금으로 '오렌지 인권상'도 시상하고, 오렌지를 추모하는 이들이 모여 오렌지 추모문화제, 사진전을 열 예정입니다.
#오렌지 #허기저 #안병주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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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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