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에서 반기문 UN사무총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반 총장은 특히, 국제 분쟁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유엔 총장 본연의 임무를 여러 차례 방기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인들을 상대로 2014년 이후 42건에 달하는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파견 평화유지군의 수장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 출신).
또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간의 유혈 충돌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태에 대해 스리랑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이웃 나라 인도 출신의 조사관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 관한 현실감각에 문제를 보였다. 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리더십조차 발휘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반 총장은 IAEA 사무총장으로서 부시 미 정부가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엘바라데이보다 더 유약한 리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반 총장은 현상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남다른 비전으로 구조적 병폐를 청산하는 등 한국 정치 문화의 체질 개선에 필요한 개혁적 지도자는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엘바라데이의 대통령 도전이 실패로 끝난 이유 중 하나는 '모국 내에서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활동한 엘바라데이는 모국의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그저 좀 유명한 '외지인'에 불과했고 야권의 공식적 단일 지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력한 야권 세력이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와 유사한 정치 강령을 가진 무슬림형제단이 서구식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엘바라데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은 당연했다.
엘바라데이가 이집트의 척박하고 분열된 야권에서 고전한 것과 달리 반 총장의 정치적 전망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인다. 당장 자신을 뒷받침해줄 정치적 세력의 토대가 미비한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만약 새누리당이 진심으로 반 총장의 영입을 원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도 모든 당내 역량을 발휘해 그를 대선 주자로 만들고자 지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 여당인 만큼 대선 후보를 거머쥐기 위해 치열한 당내 경선을 감수해야겠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과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 집착하는 '한국 특유의 신민형 정치문화'가 맞물려 그의 대선 도전 과정은 의외로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기문 대세론'를 경계하는 이유하지만 반 총장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진정으로 필요한 지도자인지는 여전히 강한 의문이 든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치중한 나머지 실질적인 삼권분립과 당내 민주화가 아직 요원한 '87년 체제'에서 진일보하기 위해 한국 정치에 필요한 리더십은 현상유지가 아닌 사회 구조적, 정치 문화적 개혁을 위한 정치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보여준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고 토호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충청과 TK연대를 조장하는 진부한 지역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상투적인 언변을 구사해 정치 혐오에 빠진 부동층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편의주의적 전략을 취하려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공감과 깊이 있는 담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차기 대선 주자라고 가정했을 때, 여권의 정치인들이나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모난 정치적 언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의 불통 대통령 리더십으로 당권을 위협받았다고 판단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반 총장이 비교적 예측가능하고 제어하기 쉬운 '바지사장'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강대국들의 거부권 없이 유엔 총장 연임에 무난하게 성공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반 총장의 국제적 인지도를 이용한 새누리당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집권 시 외국과의 협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2013년 7월, 무르시 정부를 전복한 군부의 쿠데타 이후에 엘바라데이가 부통령에 임명된 것도 그의 대외적 인지도를 이용해 서방을 상대로 합법 정부 승인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군부의 정략적 영입이었다. 반 총장이 정말 대선 출마에 뜻이 있다면 현재 자신을 향한 여권의 정치적 구애와 국민의 높은 지지율이 결코 본인의 정치 지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선 본인의 현재 직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드리는 바이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대외적 직위를 이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만을 기름장어처럼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부당한 외압과 관행에 맞서 소신 있게 대응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기술적 능력 외에 소통, 분배와 관련된 탈권위주의적 공감의 능력, 더불어 개혁을 위한 굳센 정치적 결단력이 반 총장에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끝으로 필자가 고2때 벌어진 '김선일씨 피랍 사건'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보여준 그의 무능하고 영혼 없는 수습능력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는 '반기문 대세론'을 경계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