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서원의 강당(왼쪽)과 사당
정만진
따라서 오천서원은 너무나 조용한 산속에, 그 어떤 행인의 눈에도 띄지 않는 채 파묻혀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본다. 세파의 흐름이 없는 고요한 전원이 학문 연마 공간으로 바람직하고, 자신을 돌이켜보며 수양을 하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수기치인을 위해 강학을 하고, 제향을 통해 인륜의 근본을 이어가는 공간, 그곳이 바로 오천서원인 것이다.
오천서원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한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마지막 동네인 파동, 그 파동 중에서도 끝 부분인 용계교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서원 입구 첫머리이다. 대구 250만 시민 중 이 길을 걸어본 이는, 오천서원과 그 아래 무등재 관련 문중 사람을 제외하면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서너 집의 담장이 끝나면 곧장 법이산 자락이 나타난다. 길은 그냥 산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다니는 이 없으니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거나 잡음을 내는 사람도 없다. <도화원기>의 동굴 속 세상은 닭과 개들의 소리조차 평화롭다고 했지만, 이 계곡에는 닭도 개도 없다. 300미터 가량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 문득 오천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외삼문 앞에 서니 왼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중화양씨대동종친회(中和楊氏大同宗親會) 헌성록(獻誠錄) 비석과 중화양씨대동종친회 창립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동종친회를 창립하고, 서원을 중창할 때 기부를 한 문중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빗돌이다. 서원 전체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은 외삼문 오른쪽 담장 모서리 앞에 있다.
깊은 산속에 있지만 규모는 예상 외로 큰 오천서원오천서원은 뜻밖에도 상당히 규모가 크다. 깊은 산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만 서원이지 사실은 오래된 기와집 한 채 정도가 아닐까 여겼던 지레짐작이 무색할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특히 4칸으로 지어진 강당이 뒤로 산을 등지고 있어 자연스럽게 웅장한 면모를 띠게 된데다, 그 왼쪽에 서재(西齋)처럼 자리잡고 있는 무릉재(武陵齋)가 전체 건물을 ᄀ자 형태로 키우고 있어 한결 우람차 보인다.
강당 동쪽에는 담장을 달리한 채 오천사(梧川祠)가 세워져 있다. 그래서 안내판은 '1786년(정조 10)에 건립한 오천서원은 조선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士林)에서 세운 것으로, 좌측에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제수청(祭需廳)이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으며, 강당 우측에는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祠堂)이 한 단 높게 토장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이루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외삼문, 강당, 제사청이 한 울타리 안에 있고, 사당이 별도로 독립된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사당 담장 밖에는 중화양씨 시조인 당악군(唐岳君) 등 다섯 분 선조의 단소(壇所)가 있다.
오천서원은 양희지 한 분을 제향하고 있다. 양희지는 연산군 당시 대사헌을 지낸 인물로, 1437년(세종 21)에 태어나 1504년(연산군 10) 타계했다. 그는 삼포(三浦)에 왜구가 노략질을 하는 난리가 발생했을 때 경상도로 내려가 장수들을 지휘, 왜구 추장 사두(沙豆)를 잡아 처형했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굉필, 정여창 등이 멀리 서북도로 유배 되자 그들을 한양 가까운 곳으로 옮겨달라고 주장하다가 경북 포항 장기 바닷가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