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고려대에 카카오톡 언어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사고화 표현 및 Academic English'를 함께 듣던 남학우 9명으로 구성(가해지목자 8명)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1년여동안 수많은 동기, 선배, 새내기 등 여성 전반에 대한 언어성폭력이 있다는 사실이 내부고발에 의해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아래 대화는 해당 카톡방에서 나눈 대화중 일부분
정대후문페이스북
이건 '여성혐오' 문화의 문제다이번 고려대 사건과 비슷한 일이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있었다. 단톡방의 언어 성폭력이 외부로 밝혀졌고, 사건은 인권센터로 접수됐다. 피해 여학생은 가해 남학생들이 누구인지 알게 됐고, 결과는? 인권특강으로 강의실을 찾아온 인권센터 담당자는 말했다. 달라진 건 없었단다. 피해 여학생이 휴학하고 학교를 떴다는 게 달라진 거라면 달라진 거겠지.
이게 지금의 고려대와 그때의 내 학교, 두 학교만의 문제일까? 그중에서도 이번 '그 학과'와 저번 '그 학과'의 문제? 당연히 아니다. 강의실에서 함께 분노하던 모든 사람들(당연히 나를 포함해)은, '단톡방'으로부터 자유로울까? 당연히 아니다. 이건 해당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깔린 문화 자체의 문제니까.
고등학생 때, 군인일 때, 대학 1학년 때든 2학년 때든 몇 명이고 우르르 몰려다니던 남성 집단의 저속한 농담들을 기억한다. "따먹"이나 "존나 먹이고, 쿵떡쿵"같은 것들이 과연 새로운 것일까? "씹던 껌"이나 "벌려 줄" 거라는 표현이 정말 악마들의 전유물일까? 다시 말하자. 어휘의 수위나 어감의 정도만 다를 뿐, 사실 이건 일베나 변태성욕자들의 언어가 아닌 이 사회 자체의 언어였다.
여성을 "따먹"는 무언가, 맛있거나 맛없는 음식 같은 것으로 비유한다거나, 여성에게 정도 이상의 술을 권해 섹스의 가능성을 높이자 한다거나, '다리 벌림'이나 '보픈'같은 표현으로 성관계(그것도 다분히 여성을 객체화시킨 형태의)를 암시하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의 맨컬처 속에서 절대 특수한 경우의 수가 아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혹은 마음이 없더라도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 이 비슷한 표현을 쓰거나, 들을 수 있다.
당신은 "새내기 따먹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나 당신 옆의 누군가가, 새내기 중에 누가 예쁘고, 누가 별로며, 누구는 가슴이 크고 누구는 다리가 예쁘다는 식의 말을 하는 걸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바로 그때 '가해자 여덟 명'과 '당신 주위'의 두 언어는 여성혐오라는 채널을 통해 명확하게 맞닿는다. 수위를 넘나드는 이 채널의 공유야말로 이 문화 전체의 여성혐오적 경향성이고, 그래서 이건 '해당'의 문제가 아니다. 명확하게도 이건 문화의 문제다.
분노의 맥락을 바꿔야 한다'악마 같은 가해자'들과 그걸 보는 '나'의 섣부른 분리를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총체적 문화의 문제 속에서 우리 또한 언제든 악마가 될 준비를 마친 지 오래니까. 지금 정말로 시급한 건 '해당 몇몇'들에 대한 분리와 비난이 아니다. 그것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생산해 놓는 우리 문화,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진부한 거 안다. 그러나 이 진부한 성찰이 없기에 어쩌면 당연할 '기본값의 분노'조차 새삼스러울 수밖에. 차라리 "또 고려대"나 "헐 고려대"에서 고려대를 지우고 한국 남자를 써넣고 싶다. 그에 따를 갖은 '논리적 반박'보단 바뀌지 않고 빙빙 도는 이 남성문화가 훨씬 더 짜증 날 테니까. 분노의 맥락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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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특별'하지 않은 고려대 카톡방 성폭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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