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선다
정효정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좀 쓸쓸한 기분으로 안개 낀 성벽과 옛 건물을 홀로 헤맸다. 10시가 되자 순례자 사무실이 열렸다. 백발의 직원은 흔쾌히 오리손 산장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도와줬다.
"오늘 오후 2시까지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야 해. 안 그러면 네 침대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 거야 " "음...? 난 내일 묵을 숙소예약을 부탁했는데?" 내일 묵을 숙소를 예약하겠다고 했는데 그녀가 잘못 알아듣고 오늘 묵을 숙소를 예약해버렸다. 난 오늘 출발할 마음이 없으니 내일로 바꿔달라고 우겼으나, 직원은 다시 전화하기가 귀찮았는지 오리손까지는 7km니까 그냥 지금 가라고 날 설득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그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얼떨결에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것도 입고 자던 면원피스를 입은 채로... 그리고 한 시간 후, 인적 없는 산길에서 개를 끌고 가는 남자와 만난 것이다.
남자들이 물었다 "개와 남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개 주인은 스페인 출신의 타고르, 검은 개의 이름은 토르다. 이 개는 등에 작은 개 전용 배낭을 지고 있었다. 타고르 말로는 자기식량은 스스로 지고 가게 한단다.
타고르는 통성명을 하자마자 대뜸 내 사연부터 물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다 사연이 있지 않겠냐며. 별 사연이 없는 게 사연이긴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의 사연은 뭔지 물어봤다. 그러자 준비했다는 듯이 4개월 전 헤어진 여자친구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완벽한 커플이었단다. 두 명 다 동물, 특히 파충류를 좋아해서 함께 살며 20마리의 파충류를 길렀다고 한다. 파이톤도 두 마리나 있었단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이 반려동물 취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만큼, 그들은 크고 작은 싸움을 반복하다가 헤어지게 됐다. 문제는 함께 키우던 반려 파충류들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파충류들을 분양하거나 팔고, 마지막 남은 파이톤까지 넘기고 나자 그에게 남은 건 개, 토르 뿐이었다. 그러자 이 개를 데리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의 연애담과 파충류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웠지만 나는 이미 속도가 뒤처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산을 안 다녀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등산용품은 엄마 걸 빌려온 거였다. 엄마 등산화, 엄마 등산스틱, 엄마 무릎보호대... '아마 엄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등산을 못가시겠지.' 프랑스의 한 시골길에서 잠시 엄마 생각에 잠겼다.
고전하고 있는 나를 보던 타고르는 토르의 목줄을 내 배낭 허리끈에 묶어줬다. 그러자 졸지에 큰 개가 날 끌고 가주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게 무슨 개썰매도 아니고, 내 무거운 몸뚱이를 의지하려니 개한테 너무 미안하다. 결국 토르를 풀어줬다.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던 타고르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