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막장 가족'의 질주

[한국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25] 심윤경 소설 <사랑이 달리다>

등록 2016.07.03 11:06수정 2016.07.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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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뜬금없이 '느림의 미학'을 배웠다며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느림의 미학? 순간 칭찬인지 욕인지 구별할 길이 없어 그냥 멀뚱히 친구를 바라봤습니다.

친구도 말만 꺼내 놓고 그냥 보고만 있길래 '아니, 난 나름대로 열심히 빠릿빠릿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이런 말을 하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가 말합니다. 자기는 경쟁심이 강하고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보다 잘 해야 할 것 같아 매번 긴장하며 살곤 하는데, 제게선 그 어떤 경쟁심도 뭘 잘하고자 애를 쓰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게 좋아 보인다고요.


내용을 들어도 역시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이 같은 평을 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냥 친구를 향해 웃음이나 흘려줬어요. 그러자 그도 씩 웃더니 더 이해 안 갈 말을 하고 뒤돌아 갑니다.

제 얼굴에서 뭔가 느림의 기운이 느껴진다나요. 얼굴에서마저도? 저는 얼른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얼굴이 느려 보이는 듯 보이더라는. 과학적으론 설명 불가합니다만, 그러니까 그가 말한 '느림의 미학'은 저의 경쟁심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말인데요.

전 분명 경쟁심도 있고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굴뚝같아질 때가 참 많은데 왜 이런 말을 듣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자 저의 고질적인 문제가 떠올랐어요. 남들의 관심 사항엔 대게 영 관심이 없고 내 관심 사항 몇 개에만 잘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긴다는 점이요.

그리고 주로 이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고요. 그런데 이 세상은 주로 제 관심에서 빗겨난 것들이 주류로 흘러가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앞으로도 전 죽 누군가에게 '느림의 미학'을 선사하며 살 게 될 듯합니다.

막장 가족이 여기에 있다


 책 표지
책 표지 문학동네
이런 저이다 보니 제 눈엔 특정 사람들이 참 빨라 보입니다. 저는 감도 잡히지 않는 어떤 흐름을 타고 부지런하단 말로도 부족할 만큼 급히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사람처럼 멈추지도 않습니다. 방향감각을 잃은 듯 달려가는 그들의 목적지는 정해지지도 않은 듯 보이고요. 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 다 압니다. 그들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를요.

<사랑이 달리다>의 혜나 가족도 제겐 참 빨라 보입니다. 아니, 너무 빨라 보입니다. 가족 구성원 대부분은 쉼 없이 달립니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들처럼 앞만 보며 직진할 뿐입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몇 페이지 안돼서 저는 이 가족이 '미친' 가족이란 걸 간파했습니다. 역시나, 혜나 역시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기네 집안은 "미치광이 집안"이라고요.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가족이 여기에 있습니다. 칠순을 넘기고 큰 아들보다 두 살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 이혼을 감행한 졸부 아빠. 그런 남편을 순순히 인정하며 거의 사기당하듯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이혼당했으나 가정 도우미는 꼭 써야 하는 몽상가 엄마. 돈이 있는 자만 사람이며 그 외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 통에 동생들마저 사람으로 보지 않는 큰 오빠. 수십억 빚을 지고도 일 억짜리 스포츠카를 새로 장만한 작은 오빠. 그에 걸맞은 아내들. 그리고 가장 정상인 듯 하나 역시 피는 못 속이는 혜나.

기가 찰 정도의 만행을 저지르는 이 사람들을 소설에서 만나게 된 건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주위에 있었다면 말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 못할 사람들이거든요. 도덕적으로 어긋난 짓도 참으로 잘 저지릅니다. 그런데도 뭘 잘못했는지 몰라요. 그러니 혜나가 상황 설명을 해야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는 건 이해할 만합니다.

"체면도 쪽팔림도 모르는 우리 집안의 오랜 법도에 따라…".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인물을 도덕적 감수성으로만 판단하게 되진 않죠. 소설 속 인물을 도덕적 인간이라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비도덕적 인간이라 싫어하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불을 뿜듯 터져나옵니다. 이다지도 정신없고 비도덕적인 인물들에게 정이 팍 들어버리게 되거든요.

그건 적절하게 터지는 유머 때문입니다. 전 최근에 이렇게 웃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배를 잡고 웃었어요. 소설 속 유머는 섬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의 대화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을 누군가 똑같이 흉내내면 정말 웃기잖아요. 이 책의 웃음 유발 코드는 바로 마치 정말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 그 자체입니다. 이런 인물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선택할 때마저...

이 소설은 주로 로맨스 소설로 읽히는 듯해요. 혜나와 혜나가 사랑하게 된 남자 정욱연과의 러브 스토리. 혜나와 욱연이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란 점만 빼면 둘의 러브스토리는 분명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제게 이 소설은 세태 소설로 더 읽힙니다. 혜나가 욱연을 선택하는 이유 조차도 세태를 반영하는 듯 보이거든요.

혜나 남편 성민은 유순한 성품을 지닌 안정적이고 성실한 남자입니다. 반면 혜나가 사랑하는 욱연은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입니다. 이런 욱연에 푹 빠져버리는 혜나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외모 좋고, 성격 좋고, 학벌 좋고, 대기업을 다니더라도 현실도, 돈도 잘 모르는 성민은 시대에 뒤처진 인물입니다. 소설에선 그의 안정감, 성실함마저 구시대의 유물 같아 보입니다.

반면, 욱연은 이 시대의 인물입니다. 그가 혜나의 선택을 받은 건, 물론 그가 매력적인 인물 이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돈을 알고, 돈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혜나가 반한 건 돈이라기 보단 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안함과 위태로움일 겁니다. 혜나에게 매력적인 건 이젠 성민의 그것이 아니라 욱연의 그것이니까요.

그나마 소설에서 반성하고 성찰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인 혜나가 문뜩문뜩 작은 오빠 김학원의 차를 떠올리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시속 백육십 킬로미터로 다섯 차선을 가로지르는 김학원의 차는 죽음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런데 혜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 맛에, 이 자극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요.

혜나는 오빠들을 부끄러워하지만 혜나 본인도 역시 오빠들과 같은 종족이 돼버린 거죠. 달리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종족. 이미 몸에 밴 돈의 감각을 결코 지워내지 못할 종족. 나쁜 줄 알지만 염치 불고하고 나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할 종족. 이런 혜나는, 과연 멈추게 될까요. 책을 읽으며 저는 이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혜나는, 멈출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사랑이 달리다>(사랑이 달리다/심윤경/문학동네2012년 07월 20일/1만 2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문학동네, 2012


#심윤경 #사랑이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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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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