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구미초등학교 교사, 뒤로 금오산이 보인다. 1950년대 필자가 다녔던 때의 교사는 아니다.
박도
직지사로 수학여행을 가다나는 중학교까지 고향 구미에서 다녔다. 지금 돌이켜봐도 유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지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내가 늘그막까지 글줄을 쓰고 사는 것도 아마 그 원천은 그 시절을 대자연과 더불어 산 덕분일 것이다. 나는 38선 부근에서 한국전쟁이 한창 계속되던 1952년 봄에 구미국민학교(현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의무교육이라고 했지만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미취학자가 더 많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초가로 된 임시교사에서 맨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이 배웠다. 대부분 학동들은 바지저고리로 책보를 들고 다녔고, 미군들이 나눠준 분유를 끓여 간식으로 먹거나 그것을 지급받아 집에서 쪄 먹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 같은 도시학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상급학교 진학준비로 가장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지만 우리 촌동(村童)들은 그런 입시공부 열풍에는 무풍지대로 날마다 농사일을 돕거나 아니면 촌동들끼리 몰려 신나게 놀기만 했다.
서울은 먼 나라로 가본 아이들은 거의 없었고, 서울말씨는 경외의 대상으로 서울을 다녀온 사람이 서울 이야기를 하면 넋을 잃고 들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다 보니 봄가을 소풍은 으레 금오산으로 6년 동안, 아니 9년 동안 그곳으로만 갔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봄 소풍 때 김천 직지사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은 전세버스는 없었거니와 그런 버스를 타고 갈 만큼 경제적인 형편도 도로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열차를 타고 갔는데 학교에서는 아이들 집안형편을 고려하여 열차비만 거뒀고, 절에서 1박하는 숙식비로 쌀 한 되를 각자 지참케 했다.
우리 촌동들은 각자 보자기에 쌀 한 되를 지참하고 구미 역에서 서울행 상행 완행열차를 탄 뒤 40분 쯤 지난 뒤 직지사 역에 내려 거기서 2킬로미터 남짓 걸어 직지사에 이르렀다. 그때 처음으로 열차를 타본 아이들도 꽤 많았다. 숙소는 직지사 큰 선방이었는데 가운데는 담임선생님 두 분이 가로 누우시고 양쪽으로 남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몰려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