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 참가한 일행이 답사하는 동안 이재언 연구원이 지참한 드론이 사진 촬영을 담당했다.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행들
오문수
서울음대 작곡과(2년)에 학사 편입한 그녀는 서양음악과 함께 국악강의도 들으면서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강의를 쫓아 다녔다. 대학원에서 국악을 전공하려면 학부에서도 국악과를 나와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론은 언제라도 쫓아갈 수 있겠으나 악기는 연륜이 필요하다.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피아노, 거문고, 가야금, 해금, 장구 등 악기 연마에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제도가 바뀌어 어느 학부를 나오든 대학원을 선택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서울음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 전공을 할 수 있었다.
"사회적 출세의 관문이라던 법의 길에서 음악으로 돌리며 가진 유일한 바람은 내가 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일선에 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일념뿐이었요. 대학교수가 되는 정도는 안중에 없었죠." 리듬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굿음악과 전통 무용 중엔 난해한 장단이 많았다. 동해안별신굿, 남해안별신굿, 서해안 별신굿 등의 굿음악 장단을 익히는 한편 굿거리 장단의 속살을 느끼기 위해 굿거리 춤을, 진쇠장단을 알기 위해 진쇠 춤을, 살풀이 장단을 위해 살풀이 춤을 배워나갔다.
대학원 졸업 후 문화재청에 입사한 그녀의 첫 일거리는 농요를 지정하기 위한 보고서 작성이었다. 농요엔 크게 어려운 장단이 없어 그녀의 연구 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예천의 통명농요를 녹취하고 돌아오려는 찰나에 군청직원이 "이웃면인 풍양에 가면 전혀 다른 농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풍양면엘 들렸다.
이층 마을회관에 노인들이 가득이었다. 전임 면장 재직 당시에 한 번씩 모이면 부르던 농요였으나 면장도 퇴임하셨고, 방송국이나 누구도 찾아와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터라 "이 노래 불러 무엇하느냐?"고 시들한 판에 그녀가 들렀던 것이다. 낙동강 지류를 사이에 두고 생활권이 달랐던 터라 두 지역의 농요가 판연히 달랐고 모두 우수했다.
"귀경 길에, 이분들에게 공연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없을까 ? 생각했었지요. 농요보존회(현 두레소리보존회의 전신)라는 단체를 발족시키고는 서울로 초대하여 공연했어요. 이를 계기로 경북 대표로 전국민속경연에 나가 국무총리상에 이어 대통령상까지 수상하자 경상북도에서 공처농요를 도문화재로 지정했어요."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선소리꾼이 돌아가시면 소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그녀는 3년 동안 각 시군마다 3개 읍면씩의 농요를 녹음해 가면서 <한국의 농요> 제1집을 발간(1985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