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랑리 토굴 막사 앞에서 기자
박도
나는 평생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언젠가 아들이 내 주량을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평생 마신 술의 양은 아마 소주 한 박스도 안 될 겁니다."내 삶을 곁에서 지켜본 아들의 말이라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나는 체질적으로 술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집에서 기제사를 지낸 다음 음복술은 냉장고에 저장되다가 아내의 조리에 쓰이거나 쉬어 버려지곤 했다.
이름난 문장가들은 대체로 술을 즐겼다는데 나는 애주가가 아니라서 아직도 좋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술을 되도록 멀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나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나는 학훈단(현재 학군단, ROTC) 7기생으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전방 보병부대에서 2년 남짓 초급장교로 근무했는데, 후반 1년은 주로 파견 캡(CAP) 소대장으로 보냈다. 그 무렵 파견소대의 사고 원인은 대체로 음주가 발단이었다. 특히 파견소대장의 상습적인 음주는 민폐 및 대민사고를 유발했다. 그런 사고가 나면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술을 먹지 않은 초급장교를 물색했고, 그 결과 으레 내가 가장 먼저 발탁되곤 했다.
초급장교로 파견대장을 한다는 것은 거기에 책임도 따르지만, 파견부대만은 자기 소신대로 부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군대생활 후반기 1년은 비교적 편하고 자유롭고 부대원들의 복지 향상에 최선을 다했다(이 부분은 내가 말할 문제는 아니고 부하 소대원들이 평가해야 할 테지만…).
산중 토굴 막사
1971년 초겨울 나는 상급부대의 명령으로 대대 직할소대 병력을 이끌고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발랑리 인근의 금병산 길목을 지키는 산중 토굴 막사로 갔다. 막사에 도착하고 보니 산중 토굴 막사로 그 시설이 침통하기 짝이 없었다. 꼭 빨치산 근거지와 같은 컴컴한 토굴로 대낮에도 석유등불을 켜고 지내야 했다.
그때 우리 부대(1캡)의 주된 임무는 야간 무장공비들의 침투로를 경계하는 일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올빼미처럼 침투 예상로에서 밤새 잠복 근무를 했다. 이튿날 아침 야간 잠복근무조가 철수하면 그제야 소대원들은 내무반 막사에서 잠을 잤다. 토굴 막사 안은 난로를 피웠기에 추위는 견딜만 했지만, 땅에서 솟아오르는 습기를 막고자 맨 바닥에는 짚을 깔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목이 아플 정도로 먼지 공해가 몹시 심했다.
그 며칠 후 나는 일일결산 시간 때 막사 환경 개선책으로 내무반장과 분대장에게 지시했다. 민간인 마을로 내려가 벼 짚을 얻어다가 그걸로 멍석을 짠 뒤 맨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라고. 그들은 일제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일주일 쯤 지난 후 내무반 막사로 가자 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는 등, 먼지 공해가 거의 없었다. 그동안 소대원들은 멍석을 짠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는데…. 내무반장에게 연유를 물었다.
"내무반장! 어떻게 된 거야?"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대장님은 그냥 모른 척하세요.""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