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회] 금의위는 이쯤에서 손을 떼시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83회]

등록 2016.08.05 11:48수정 2016.08.0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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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으으으윽, …음, 으음."


운부산 사냥꾼 진씨가 내뱉는 신음은 듣는 사람에겐 그 자체로 공포였다. 상투가 풀어진 진씨의 얼굴엔 온통 피칠갑이었고 꿇어앉은 무릎 뒤쪽의 발목은 바깥으로 툭 불거져 관절이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의 팔 또한 팔꿈치 밑으로 너덜거려 이미 힘줄이 끊어졌거나 뼈가 부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주원외는 치솟는 분노로 치가 떨렸지만 한편으론 온몸을 타고 오르는 공포에 몸을 덜덜 떨었다.

느닷없이 집에 들이닥친 자는 넷. 둘은 검은 옷에 금(金)자가 새겨진 배자를 입고, 나머지 둘은 평범한 포의를 입었지만 경장 차림에 허리에 검을 찼다. 배자를 입은 자들은 금의위 일 것이고 평복을 입은 자들은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무반이거나 관과 연루된 강호인이리라.

처음엔 길을 잃은 사람인 줄 알았다. 간밤에 놓았던 덫을 점검하려 집을 나서던 그는 불시에 들이닥친 무리들에게 길이나 안내해주면 되는 줄 알았다. 일행 중의 한 명이 어깨에 짊어진 흽스름한 덩어리를 땅바닥에 털썩 내려놓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짐인 줄 알았지 설마 사람인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사냥꾼 진씨일 줄이야. 깜짝 놀라 진씨에게 다가가려는데 그 중 한 명이 쓰윽 하고 검을 뽑더니 그의 가슴을 향해 겨누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안중에도 없는 차가운 말씨로 내뱉었다. 칼은 든 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가운데 선 나이든 자가 염소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이 자를 알고 있겠지."

염소수염의 말투엔 왠지 모를 위엄이 서려 있다.  


"…."

주원외가 말이 없자 칼을 든 자가 칼끝으로 진씨의 등을 쿡 찔렀다. 진씨가 따끔한 자극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고 정신이 반쯤은 나간 듯 했다.

"아… 알고 있소. 다… 당신들은 누구요?"

주원외는 조심스레 물었다. 백련교를 피침하려는 관의 무리들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한동안 잠잠했던 관이 움직인 것인가. '진공가향 무생부모(眞空家鄕 無生父母)' '미륵세세 무무정토(彌勒歲歲 无无淨土)' 주원외는 속으로 백련교의 진언을 중얼거렸다. 동시에 집안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제발 바깥 소동을 눈치채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몰래 빠져나갔으면, 아니 조용히 숨어 있기라도 했으면, 주원외는 간절히 빌었다.

"우리는 대명 황제의 명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쫓고 있는 자들을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걸 이 자가 실토했다."

염소수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의위 옷을 입은 텁수룩한 중년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대역죄인들이니, 어디로 갔는지 이실직고하라."

주원외는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백련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온 관군이 아니라 어제 만났던 남녀를 추적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쫓기는 남녀를 보호해주고 도망치게 해 준 건 백련교도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자 도리다. 조정은 백련교가 꿈꾸는 정토(淨土)세상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 그들에게 쫓기는 역도라 함은 곧 백련교도의 동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애초에 그들에게 안전한 길까지 안내해 준 것 아닌가.

"남녀가 오긴 왔소만 금방 떠났소이다."

주원외는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어디로 갔느냐."

텁수룩한 금의위 위관이 말했다.

"모릅니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라. 우린 길게 끌지 않는 사람들이다."

염소수염이 단호하게 말했다.

"행선지를 마, 말하지 않고 떠났소이다."

주원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나왔다.

"우리는 네가 백련교 끄나풀인줄 알고 있다. 우리는 다만 연놈들만 쫓을 뿐이니, 문제 삼지 않겠다. 연놈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말하라."
"저 정말이오. 어디로 갔는지는 모, 모릅니다."

주원외가 손을 저으며 부인했지만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떨려 있었다.

"풍장반!"

염소수염이 텁수룩한 중년인을 보며 말했다. 풍천의가 옆에 있는 금의위 대원을 향해 눈짓하자 그가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대원이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낙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나왔다. 그 뒤를 아이들이 따라왔다. 금의위 대원은 아낙과 아이들을 마당에 꿇어앉혔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연놈들이 어디로 갔느냐?"

채욱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대원이 칼끝을 아낙의 목덜미에 댔다. 아낙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아이들은 제 어미의 허리춤을 잡고 울먹였다.

"마, 말하겠소. 식솔들을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주원외가 쿵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남녀는 소림사 묘적암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너에게 행선지를 순순히 말해주었느냐."

채욱이 심문하듯 말했다.

"소인이 음식을 내어주자 그들이 마음을 풀었고, 소림사를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가장 빠른지를 묻길래 숭산은 동서로 수백리라 장안에서 가는 길, 낙양에서 가는 길, 정주에서 가는 길이 각각 달라 최종 행선지가 어디냐에 따라 가는 길이 천차만별이라고 했더니, 그들은 숭산 자실봉의 묘적암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주원외한테 관조운과 혁련지가 소림사 묘적암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채욱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왜 소림사 묘적암으로 갔을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추적을 벗어나려면 좀더 북쪽 대항산 쪽으로 가거나 동북 방면으로 우회하여 초작현으로 빠지는 경로를 택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만약 남녀가 소림과 얽히게 된다면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림을 두려워할 건 없지만 은밀한 임무 수행을 첫째 원칙으로 삼는 은화사로선 귀찮아 질 수도 있다. 기회만 있으면 무림의 맏형 노릇을 자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소림인지라, 진경과 관련하여 약간의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 그 권리를 주장하려 할 것이다. 다행히 소림 본사가 아니라 암자라고 하였다. 크게 보면 소림의 영향 안에 들어 있겠지만 일단은 암자부터 빨리 찾아야 될 일이다. 묘적암과 소림 본사 간에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빨리 가서 고리를 끊는 게 일을 마무리 짓는 첩경이다.

"풍장반, 우리는 빨리 숭산으로 가야겠소."

채욱이 풍천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들을 어쩔까요?"

풍천의가 말했다

"놔둡시다. 지금에 와서 백련교 나부랭이 하나둘 처치한다고 해서 뿌리가 뽑히겠습니까"

채욱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풍천의에게는 은화사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쓰겠냐는 듯이 들렸다.

"너는 우리를 지름길로 안내하라. 만약 네 말이 거짓일 경우 내 관부(官府)에 연락하여 산중에 있는 백련교를 모조리 소탕하라 이를 것이다."

채욱이 주원외를 향해 못을 박았다.

"네…, 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하겠습니까. 부디, 제 가솔들의 목숨만 부지해주십시오."

주원외는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복종의 뜻을 표했다.

"풍장반, 잠시 얘기 좀 나눕시다."

채욱이 풍천의를 향해 말한 후 일행과 몇 걸음 떨어진 마당의 귀퉁이로 갔다. 풍천의 옆에 다가갔다.

"이쯤에서 몸을 가볍게 합시다. 소림사까지 많은 인원이 추격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맞지 않을 것 같소이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은화사가 해결하겠소이다. 그동안 도움을 줘서 고맙소이다. 상대부 어른께서도 금의위의 노고를 분명히 치하할 것이오."
"채당주, 쥐새끼 같은 남녀가 아직 잡히지 않았고, 여기서 소림까지 멀다면 먼 길이오니 관부의 손길과 우리의 도움이 좀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손을 떼라는 채욱의 의견에 풍천의가 다급하게 변명을 하며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의사를 표했다. 

"아니올시다. 남녀의 행선지가 밝혀진 이상 번거로운 검문과 요란한 추격은 도망자를 더욱 숨어들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추적하는 건 응당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또 우리가 전문이올시다. 귀 금의위께 더 이상의 수고를 끼친다는 건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하달 받은 명(命)의 취지에도 맞지 않소이다."

채욱의 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채당주의 의견을 받들어 저희는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풍천의는 잠시 머뭇거리다 채욱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어 풍천의는 신렵에게 금의위 명령으로 관병의 수색 작전을 중단하고 수색대를 해산하라고 지시하였다. 신렵이 명을 받들어 읍을하고 물러나자 채욱은 동백웅과 함께 주원외를 앞장 세우고는 남녀를 안내했던 탈출로로 향했다.

채욱은 금의위에 지원 요청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빠지라는 게 앞뒤가 맞진 않지만, 감찰기관으로서 서로를 견제하는 금의위에게 더 이상의 정보를 노출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남녀의 행방이 드러난 이상 은밀히 일을 추진하는 게 상대부의 밀명을 보다 완벽히 수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쯤에서 금의위를 떨쳐내고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게 상책이다. 언제든 칼끝을 돌려 목을 찌를 수 있는 금의위는 떨쳐낼 수 있을 때 빨리 떨쳐내는 게 후환을 방지하는 것이다.

풍천의는 채당주가 금의위의 노고를 치하하며 손을 뗄 것을 은근히 종용한 건 진경을 그들이 독차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았다. 무극진경을 입수하기 위해 은화사가 언제부터 손을 쓴 것인지 풍장반 본인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오른팔 신렵을 북경에 보내 알아온 바에 의하면 금의위에서도 진경을 입수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방법을 강구하여 은화사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만약 진경을 손에 넣고 상부에 보고하면 경부(京府)의 요직에 오를 뿐만 아니라 모빈 장군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모빈 장군이 특별히 경계하는 게 동창이 무력을 갖추는 일이다. 안 그래도 은화사라는 비공식적 무력조직을 운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신경은 곤두세우고 있는데, 진경까지 손에 넣어 무림인들을 좌지우지하고 경우에 따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모빈 장군이 신렵을 통해 하달한 밀명(密命)이 따로 있긴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자신의 공(功)을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노회한 채욱이라는 자가 이제 막 진경의 소재가 파악되려는 순간에 손을 떼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렇다고 딱히 거부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은화사가 요청한 건 수색작전이었지 진경의 입수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남녀가 어디로 갔는지 소재가 파악된 지금 굳이 은화사의 지휘를 받으며 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다. 자신들이 따로 움직이면 되는 것 아닌가.

여태까진 은화사와 협력관계였다면 이제부턴 경쟁관계다. 일단 수긍을 하고 저들을 방심하게 만들자 그리고 기회를 노리다 결정적 순간에 탈취하면 될 것이다. 채욱이 과거 무공으로 이름을 드날린 인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금의위 장반인 자신의 무공 역시 강호의 최고수에 속한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고 중요한 순간에 기습을 하면 승산은 훨씬 높아진다. 진경의 입수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관운의 마지막 기회이자 일생일대의 모험이다. 필부는 모험을 두려워하지만 장부는 모험을 즐긴다.

채욱과 동백웅은 주원외를 재촉하여 나는 듯이 산길을 달렸다. 어둠이 이슥해질 무렵 능선에 오르자 멀리 실뱀이 누운 것 같은 강이 보이고 옆구리에 비늘처럼 다닥다닥 붙은 인가가 보였다.

"저기 보이는 나루가 함진이라는 곳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황하를 내려가면 낙양이나 정주까지 한 나절이면 갑니다. 저는 여기서 이만……."

주원외는 양손을 비비면서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이들이 과연 고이 보내줄지 의문이었다. 채욱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승낙하자 주원외는 행여 마음이 변할까 싶어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가듯 뛰어갔다.

채욱과 동백웅은 주원외를 놓아주자마자 서로 경쟁하듯 경공을 펼치며 함진 나루를 향해 날랐다. 밤배를 부리는 한이 있더라도 한시 바쁘게 숭산으로 가야했다. 남녀가 숭산에서 잠적하기 전에 따라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림사, 묘적암. 채욱은 중얼거리면서 발끝에 힘을 주었다. 농익은 봄바람이 귓가를 후끈 스치자 상대부의 눈길이 떠올랐다. 채욱의 마음이 달아올랐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연재합니다.
#무위도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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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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