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 향도 안 하사(오른쪽)와 소대 내무반 앞에서(1969. 10.). 그는 단기하사였지만 통솔력이 매우 뛰어났다.
박도
"소대장님, 제 말이 맞았지요."그런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안 하사가 내게 항의하듯 말했다. 나도 화가 나서 중대장에게 가서 따졌다. 그 자리에는 화기소대 박한진 소대장도 함께 있었다.
"중대장님, 이건 기회 균등에 어긋납니다.""모든 건 대대장님 지시였소."그는 1, 3소대 파견근무 명령을 대대장에게 미루면서 나의 화살을 피해갔다. 그러면서 화제를 바꾸려는 양 얼른 선심 쓰듯 내게 말했다.
"2소대는 영구 막사를 쓰시오.""당연히 그래야 합니다."화기소대장 박한진 소위는 자기 소대가 트럭을 타고 온 게 미안했는지 흔쾌히 영구 막사를 나에게 양보했다. 화기소대는 이미 24인용 텐트 막사에 입주해 있었다.
나는 중대장의 불공정한 처신에는 한편 화가 났지만 박 소위의 양보에는 고마웠다. 그마저도 양보를 받지 못했다면 소대원을 달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런 탓인지 박한진 소위와는 제대 후 오래도록 유대를 이어 왔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간곡히 일렀다.
"기다리자. 그러면 우리 소대도 언젠가 파견 나갈 날이 올 것이다."그러자 장 하사가 대꾸했다.
"소대장님요,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지 마시고 한 번 치받아 뿌리이소. 강철 중대장님이 있는 한은 우리 소대 파견은 텄심더."그의 말에 여러 소대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기다려 보자고. 호박이 넝쿨채로 굴러 올지도.""하긴 오래 살면 시에미 죽는 날도 있다캅디더."나의 말에 장 하사가 다시 대꾸하자 소대원들은 허탈하게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짜증나는 자대교육 원당 부대는 교외선 원릉역과 가까운 곳으로 지금의 원당초등학교 부근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일대에는 민가가 거의 없는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진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잠복초소를 몇 군데 운영했지만 규모는 작았다. 그에 반비례로 대신 자대교육은 몹시 강화됐다. 자대교육은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새로운 내용보다 늘 반복교육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루 중대장이 대대 중대장회의에 참석하고 온 뒤 두 소대장들을 집합시켰다. 그날 회의 소집 요지는 대대 내 자체교육 강화책 전달이었다. 이는 곧 각 중대별로 공용화기 집체교육을 실시키로 한 바, 우리 중대는 3.5인치 로켓트포를 맡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중대는 LMG 기관총, 또 어느 중대는 박격포, 또 어느 중대는 57미리무반동총을 배당받았다는 것이다. 각 중대 공용화기 사수 조수는 교육기간 중 해당 중대로 파견된다고 했다.
그날 회의의 난제인 교관 선정 문제는 지난 번 막사 양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내가 화끈하게 우리 대대 3.5인치 로켓트포 교관을 자원했다. 그러자 중대장은 일주일 내로 교장(敎場) 완료 및 시강(示講, 시범 강의) 준비를 끝내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후 대대장이 각 교육장을 돌며 교장 준비 상황과 교관들의 시강을 직접 듣는다고 전했다.
중대장은 지시 명령만 내렸을 뿐, 어떻게 준비하라는 세부지시 사항도, 거기에 따른 예산배정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 그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명령이나 지시는 그야 말로 졸병들이 흔히들 하는 말 '뭐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것이었다.
나는 소대로 돌아온 뒤 소대 간부들과 이를 상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교안 작성과 강의준비만 신경 쓰고, 나머지 일은 자기들이 알서서 할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마침 그 무렵 경기공전을 졸업한 김선진 이병이 우리 소대로 전입해 온 바, 그는 차트 글씨를 잘 쓴다고 했다. 나는 백지 전지를 사다가 그에게 교안과 함께 건네며 차트 일을 맡겼다. 그런 뒤 옆에서 지켜보니까 글씨가 반듯한 차트글씨체로 솔직히 나보다 훨씬 더 잘 썼다.
외출 허락이 몰고 온 파문야외 교장 작업은 향도 안 하사에게 전적으로 맡기면서 야산에서 곧은 나무 몇 그루를 잘라다가 교안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엉성하게 만들었다가는 시강 때 대대장님한테 조인트 까질 겁니다. 우리 대대장님 성질 아시지 않습니까?"그러면서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알아서 차질 없이 준비할 테니 나는 시강준비나 잘하라고 다시 안심시켰다. 그 며칠 후 내 당직날 밤이었다. 안 하사는 소대원 세 명을 데리고 내게 와서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낮에 원당 쪽으로 순찰 나가다가 널빤지를 파는 곳을 알아뒀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두 차례나 교안대는 야전 교육장답게 원목을 잘라 만들라고 지시했으나, 그는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세 명과 함께 외출 준비를 다한 뒤 부득부득 나에게 외출 승낙을 강요했다. 나는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나머지 교장 작업도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만 그의 외출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쯤 지날 무렵으로 야음이 깊어 언저리는 칠흑이었다. 그때 위병소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근무 중, 이상 무!"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비상등을 켠 지프차가 중대 연병장으로 돌진해 왔다. 나는 중대 상황실에 후다닥 연병장으로 뛰어나갔다. 지프차에서 대대장이 내렸다.
"야, 일직 사관!""네!" 나는 크게 대답하고 대대장 앞으로 달려갔다.
"
공격! 근무 중 이상무!""뭐? 근무 중 이상 없다고?""네! 이상 없습니다.""잔류 병력, 이상 있나 없나?""이상 없습니다.""다시 묻겠다. 잔류 병력, 이상 있나 없나?""이상 없습니다.""이 새끼가 정말?"곧 대대장 군화발이 내 정강이를 걷어찰 기세였다. 나는 그 순간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마음속으로 직감했다. 일이 터질 때는 솔직한 게 얘기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상 있습니다. 소대원 네 명 외출을 허락했습니다."소대원 대신 엎드리다 그새 중대장도 BOQ에서 달려왔다. 곧 안 하사를 비롯한 네 명은 헐레벌떡 구보로 귀대했다. 모두 중대 상황실 램프 등 아래로 갔다. 대대장이 말했다.
"이 자식들이 마치 꿩 잡는 포수처럼 총을 비스듬히 멘 채 대로를 활보하고 가기에 내가 차를 세우고 어디 가느냐고 묻자 순찰 간다고 하잖아. 이 놈들 순찰 가는 복장이나 태도가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곧장 부대로 돌아가게 한 다음, 여기로 바로 온 거야."나는 그들에게 외출을 허락한 자초지종을 대대장에게 솔직히 말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대대장은 소대원 네 명에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