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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설명하기는 힘든 사연 하나쯤, 고통 하나쯤 있다. 그렇다고 각각의 것들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살, 2007년 12월 25일에 집을 나왔다. 19살부터 28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집이 없다. 원래 살던 집,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나중에 삼촌들이었던 사람들이 형제 다툼 끝에 그 집조차 독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다. 지난 9년간 나는 이른바 '특별한 날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기능이 마비돼 왔다. '특별한 날들'의 의미가 점점 뚜렷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희미해지게 사회화되었다. 불완전하게 보내는 '특별한 날들'에 애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참함을 느끼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날들을 내 삶에서 제거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 거리의 가게들은 빨갛고 하얀 잡동사니들로 이른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식당 유리창 너머로 이따금씩 단란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가족들은 취직이나 결혼 이야기를 나누었을 수도 있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중요했던 진리는 내가 밤새 계속 걷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것, 지하철 2호선 순환 열차는 아침에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에는 명절에 대한 추가적인 비참함을 들여놓을 마음의 공간 따위가 없었다. 아침을 맞아, 나는 2호선에 올라타 열차가 서울을 빙빙 돌 동안 계속 잠을 잤다. 씻는 것은 장애인 화장실에서 몰래 해결했다. 그렇게 며칠을 버텨 나는 20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그렇게 나의 삶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그것들뿐만이 아니다.
인스턴트 미역국어른이 된 나는 PC방에서 싸게 머물 수 있는 방이 없는지 검색을 해봤다. 수능이 끝나고 서빙 알바를 해 번 돈으로는 원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다 보증금 없이 싼 월세로 머물 수 있는 '고시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도 나름대로 일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월급 70만 원에 방 제공. 가산디지털단지 인근 모 고시원의 종일 총무가 됐다.
약 4~6㎡의 빠듯한 공간에 책상, 의자, 침대, (일부는) 샤워실이 있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복도 쪽 혹은 상가 건물 바깥쪽으로 창문(이라기보다는 숨구멍)들이 나 있었다. 업종은 분명 '고시원'으로 등록돼 있지만 고시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명백한 빈곤 주거 시설임에도 사회는 가난을 없다치고 사는데 익숙해져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에도 형식 상 의미를 부여한다. 나 역시 한 때 그런 미련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