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인이 정리한 건축용어 삽도들
대한건축학회지
일본어로만 쓰는 건축용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1945년 광복이 되자 건축가 장기인은 감격으로 펄펄 날아오를 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혼란스러웠다. 분명 나라를 찾았는데 우리 것은 어디에 있나 싶었다. 일상에서 수시로 일본어가 튀어 나왔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건축용어는 죄다 일본어였다. 일본현장인가? 그 변화 없음에 문득 광복이 오긴 온 걸까 헷갈렸다.
그러고 보니 1916년에 태어난 그는 그때까지 일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건축 교육을 받은 곳은 경성고등공업학교였다. 가르치는 사람도 일본인, 배우는 사람도 대부분 일본인, 배우는 내용도 일본에 이식된 서양근대건축, 모두 일제의 관립학교다웠다. 졸업 후 학교 소개로 처음 취직한 곳도 경성부청이었다.
이제 광복. 주권을 찾았는데 일본어로만 쓰는 건축용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동료의 지적에 그는 결심을 했다. 우리말로 된 건축용어를 만들자고. 그는 일단 일본건축학회에서 펴낸 건축용어집을 번안하려고 했다. <조선어사전>, <한글갈말>, <우리말 큰사전> 등을 샅샅이 훑으며 건축 관련 용어들을 추려냈다.
그런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은 금지되었고, 장기인은 그런 일제의 제도권에서 성장하였다. 한글 사전에서 건축용어를 수집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한자 사용도 차이가 있었다. 중국에 없는 한국 한자와 일본 한자가 있고, 같은 한자라도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한문으로 표기하는 것을 유식하고 점잖다고 여겨 한글 표기를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어의 한문을 그대로 한글음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건축 용어도 문제였다. 그것은 어딘가에 흩어져 있는 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었다. '건축'이라는 단어부터 그랬다. 원래 한국과 중국은 '건축'이란 말대신 영건(營建)과 조영(造營)을 사용했다.
'건축'은 일본이 1880년대에 서양건축을 도입하면서 architecture를 처음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본의 조가학회(造家學會)가 1897년 건축학회로 개칭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는 을사조약 후 관직 개편과 함께 탁지부에 건축소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건축 용어였다. 그게 없으면 우리말 건축용어가 제대로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데 장기인은 경성고공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고건축은 배웠지만 조선의 전통건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더구나 경성고공 출신 건축가들은 전통건축을 퇴보의 상징쯤으로 보았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그는 아무래도 우리말 건축용어를 맡을 적격자가 아닌 듯하다.
서른 살 장기인, 초등 중등 국어교과서 보며 다시 한글 익혀그런데 그에게는 반전의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그의 의지였다. 서른 살의 장기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교과서를 보면서 다시 한글을 익혔다. 원래는 쉽게 쓸 만한 건축용어를 찾으려고 들춰본 책이었다. 그러다 한글 공부가 되었다.
한글 맞춤법을 꼼꼼히 살피고, 동의어, 유사어, 동음어 등도 정리했다. 표준어뿐만 아니라 방언과 준말도 조사했다.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발음과 어감까지 체크했다. 걸핏하면 전기가 나갔던 상황에서 그는 촛불을 켜고 온갖 사전과 씨름을 했다. 한글, 일어, 영어, 한자 사전을 펼쳐놓고 금을 캐듯 단어들을 캐냈다.
둘째는 경성고공 졸업생치고 좀 특이한 실무 경력이 한 몫을 했다.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청, 철도국에 취직했던 선배들처럼 그도 처음에는 경성부청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채 1년이 안되었을 때 경성부청 영선과에 떠밀려 조선공영주식회사로 옮겼다.
조선공영주식회사에서 그가 6년간 맡은 일은 가회동 일대의 도시형 한옥이었다. 그때 한옥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들이 광복 후에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전통 목수, 와공, 미장공과 연결되어 전통건축 용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직장 동료를 통해 빌린 화성성역의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삽도의 정교함과 해설의 정밀함에 압도되었다. 그만큼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여느 근대건축가와 달랐다.
그렇게 모은 내용을 정리해서 건축학회에 제출하면, 학회 회원들은 매일 퇴근 후에 모여 심의를 했다. 십 수 차례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 내용은 전 회원에게 배포되어 다시 검토를 받았다. 그 과정을 통해 모인 오천 여 단어 중에서 삼천 단어를 골라 해설과 그림을 덧붙여 편집을 끝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원고 사수 작전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원고와 자료를 땅 속에 묻어 두었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보내 경성고공 동기인 신무성이 맡아 보관했다. 서울 수복이 되어서야 제자리에 돌아왔다.
다시 수정을 거쳐 대한건축학회에서 건축용어집을 처음 발간한 해는 1958년이었다. 우리말 용어집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과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있었다.
그 후로도 장기인은 우리말 건축용어 찾기를 평생 이어갔다. 그가 최고로 치는 용어는 순우리말이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누구나 이해하고 기억하고 표현하기 쉬운 생활언어, 시대의 변천에 상응하는 용어였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통용되는 한문과 외래어 표현도 함부로 버릴 수 없다고 했다. 1985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물을 모아 <한국건축사전>으로 펴냈고, 그 후에도 계속 증보판을 냈다.
그는 용어가 지식이라고 믿었다. 건축용어는 설계, 시공, 구조, 설비, 재료, 법규, 전통건축 등을 망라한다. 그만큼 여러 분야의 건축 지식을 섭렵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건축용어집을 출간한 이후 건축구조학, 건축시공학, 건축적산학 등의 대학교재를 편찬했다.
그때가 1960년대, 여러 대학에 건축학과가 신설되고 있었지만 변변한 교재가 없었을 때였다. 그의 책들은 어느 대학이든 건축과 학생이라면 한번쯤 봤을 정도로 교과서가 되었고, 아직도 판매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