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응 가옥 기단굴뚝안채 남쪽 기단에 있다. 이웃을 배려한 홍기응 가옥 대문을 보면 기단굴뚝에 대한 집 주인의 생각이 읽힌다.
김정봉
이번에는 남도다. 널따란 들녘, 야트막한 골 따라 나주→장흥→보성→화순에 다녀왔다. 고을마다 고인돌이 널려있는 풍요로운 땅이다. 거기에 목맨 민중들이 고달픈 나날을 삭이며 이 고을, 저 고을에 돌장승, 민불(民佛)을 세워 자위(自慰)하였다. 한마디로 민중 생활문화가 짙게 밴 땅이다.
나주 도래마을, 장흥 방촌마을, 보성 강골마을, 화순 달아실마을은 이런 땅위에 들어선 집성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선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이 땅에 터 잡은 성씨들은 민중들과 눈 맞추며 400~500여 년 동고동락하였다.
독보(獨步)의 설렘 속에 맨 처음 내달려 간 고을은 나주다.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나주사람들은 나주를 '작은 한양'으로 입 모아 얘기한다. '천년 목사고을 나주'라는 말에 그들의 자부심이 담겼다.
나주의 물은 영산강. 영산강은 드넓은 나주평야를 품었다. 전남 제일의 곡창으로 '나주의 풍년은 전남의 풍년이고 나주의 흉년은 전남의 흉년'이란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나주평야에 흉년이 들면 전국이 굶는다'는 말도 있다. 나주평야를 배경으로 식산 아래에 한 마을이 자리 잡았다. 도래마을이다. '식복(食福)'을 타고난 나주 고을에 먹을 게 풍부하다는 식산(食山) 아래에 들어섰으니 도래마을은 밥 굶을 일이 없어 보인다.
풍산홍씨 집성촌, 도래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