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최순실 의혹'에 관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위해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은 박근혜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너무나 오랜만에 글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부디 딱 한 번만,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먼저 당신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해 한말씀 드려야겠군요. '최순실 게이트', 아니, '박근혜 게이트'가 우리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읊어진 헌법 조항이 하나 있습니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그 조항, 헌법 제 1조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들어놓은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따라야 할 의무를 진 채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대표자로 선출된 당신에게 저의 주권을 위임해야만 했고, 이 땅의 모든 국민들 역시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그렇게 스스로의 권력을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이 저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길 원치 않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한반도 국민의 95%가 이제는 당신으로부터 그 권력을 돌려받기를 원하거나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대내외적으로 어떠한 영향력도 더 이상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그에 맞는 호칭과 직위로써 존중받을 권리가 생기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져버렸기에 그러한 호칭과 직위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잃었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아직 청와대에서 집무를 보고, 끼니를 해결하고, 몸을 뉘인다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을 나의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저는 이 땅의 민초입니다 박근혜씨, 이제 제 소개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름이면 시원한 빙수 한그릇에 행복을 느끼고, 겨울이면 따끈한 어묵 국물 한사발에 시린 몸을 녹이는 이 땅에서 가장 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입니다. 저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역사는 '민초'라 명명했지요. 맞습니다. 한반도 역사의 '진짜' 주인공이며 이 땅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하는 바탕, 저는 바로 그 '민초'입니다. 이제 수많은 민초들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권력을 위임했던 국민으로서 몇 마디 올리고자 합니다.
박근혜씨, 미안하지만 저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 저는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 나라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수많은 외신에서 '독재자의 딸, 대통령이 되다'라는 헤드라인을 뽑아내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에 치를 떨기도 했습니다.
아, 당신을 왜 지지하지 않았냐고요? 이제 막 참과 그릇,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제 뇌에 새겨질 때 즈음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독립기념관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폭력과 잔인함을 목도한 어린아이에게 친일파는 그릇된 사람들이었고, 일제는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다 보니 명명백백한 여러 증거들이 당신의 아버지가 친일파였음을 가리키고 있더군요. 이것이 제가 당신을 지지할 수 없었던 첫번째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신이 내세운 공약,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진행되었던 토론회와 각종 메니페스토 활동 등에서 드러난 정책적 한계 및 명쾌하지 못한 태도 등이 제게 당신을 지지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와 확신을 주었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성적인 요인보다 감성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당신을 지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가장 큰 이유였죠. 누구에게나 그런 촉이 있는 법이니, 이 점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맹목적인 저의 느낌을 당신이 몸소 증명해 주신 덕분에 제게는 그 무엇보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을 확실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살신성인에 감사드립니다대한민국 현대사는 '유착'으로 얼룩진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정치의 기본이라는 삼권분립은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무너져 내린 지 오래이며, 정계와 재계의 뿌리깊은 유착은 온갖 부정과 부패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특혜와 비리로 자라나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민초들은 '노오력'하며 살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의심을 품었으나 물증이 없으니, 기적을 만들었던 수많은 성공사례를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죠.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유착 관계의 민낯을 대한민국의 통수권자이신 박근혜씨가 최순실이라는 존재를 통해 몸소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국민들은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에서 아등바등 살았나'하는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죠. 하지만 저는 또 한번 박근혜씨의 살신성인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심증만 무성했던 정계와 재계, 법조계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비리를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기회를 주셨으니 말입니다. 무수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지성들이 놀라우리만치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공정성을 잃어가던 언론이 계파간의 벽을 허물고 '진실'을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심에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비단 언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녹을 먹으며 여론을 대변해야 하는 국회의 수많은 의원 여러분이 '열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신 것에도 감사합니다. 뿌리깊은 지역갈등으로 서로 할퀴고 상처주던 이들이 지금 이 순간 뿐일지는 몰라도 한 목소리를 내고있는 기적같은 광경을 연출해 주신것도 감사합니다. 이로써 박근혜씨가 대선에 임함에 있어 그토록 말씀하시던 국민대통합을 친히 실현시킨 것, 진심으로 대단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치 참여의 가치, 당신이 일깨워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