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시절의 샤를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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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야당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위는 계속 확산됐다. 급기야 1천만 노동자들까지 이 대열에 가담했다. 노동자들도 시위대에 가세하고 연대 파업을 벌였다. 그제야 공산당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촛불'이 '횃불'로 번진 다음에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느낀 것이다. 그러자 제1야당은 비판 대상을 드골 정부로 바꾸었다. 이때가 5월 하순이다. 5월 24일이 돼서야 제1야당이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967년 국회의원(하원) 총선거 당시, 집권당인 공화국민주연합은 1962년 총선 때의 233석(총 의석 482석의 48%)에 못 미치는 199석(총 의석 487석의 41%)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제1야당인 공산당과 제2야당인 민주사회주의좌파연맹의 의석은 합해서 194석이었다. 기타 정파가 보유한 의석은 94석이었다. 이랬기 때문에 194석을 가진 두 야당이 94석을 가진 기타 세력을 끌어들여 국민들의 움직임에 신속히 가세했다면, 자유와 경제적 권리를 늘리고자 했던 68혁명의 정신이 훨씬 더 차원 높게 실현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야당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랑스판 촛불 앞에서 시대와 국민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당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5월 3일의 기관지 보도를 통해 '촛불'을 끄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노회하고 권력욕이 강한 드골 대통령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시위대와 야권이 분열한 틈을 타서 그는 반격을 개시했다.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국회마저 해산해버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총선이란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가 5월 말에서 6월 초였다.
이 과정에서 드골은 시위대를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세력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과 야권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당의 비협조로 68혁명의 요구가 일반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탓에, 정치 안정을 외치는 드골의 전략은 6월 23일 총선에서 먹혀들었다. 여당은 종전보다 93석 많은 293석을 얻음으로써 전체 의석의 60%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의 이익 고려, 역풍 맞은 야당한편, 제1야당은 60석 감소한 61석을 얻고, 제2야당은 16석 감소한 57석을 얻는 데 그쳤다. 68혁명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한 야당들이 가장 큰 대가를 받았던 것이다. 68혁명에 참가했던 시민대중이 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게 야당 참패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드골과 여당도 패배한 셈이었다. 이듬해인 1969년, 드골은 지방제도 및 국회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가 역풍을 맞고 패배해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970년에 숨을 거두었다.
1970년대 들어 프랑스 야당들은 68년의 교훈을 발판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권 연대에 공을 들였다. 그래서 68의 정신이 뒤늦게나마 제도권 정치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1968년 시점에서 자신들의 사익을 내버리고 시대와 국민의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했다면, 그들 자신도 훨씬 더 잘됐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도 훨씬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는 9일에 우리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까지 촛불로 불태우려 할 것이다. 68년의 프랑스 야당들이 받은 뼈저린 대가 이상으로 한국의 여야 정당들도 엄혹한 국민적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