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선생
자료사진
오산중고등학교 각 교실마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사진과 함께 게시된 남강의 유훈(遺訓)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金廷湜) 읽으면서 오산학교를 알게 되었다.
소월의 요람이었던 오산학교, 그의 스승 안서 김억(金億), 횡보 염상섭(廉想涉)이 교단을 지켰고, 독립운동가 시당 여준(呂準)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JMS 고당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이었던 평북 정주의 다섯메 동산.
나는 그 오산학교를 꿈의 동산으로 동경했다. 그런 가운데 천만 뜻밖에도 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꼬박 3년을 봉직한 뒤 떠나게 됐다.
내가 봉직한 오산중학교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생들이 남강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서울에 재건한 오산학교다.
오산학교 창업 교주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30년에 돌아가셨기에 나는 그 어른 생전에 만나 뵐 수는 없었지만 오산학교에서 봉직하는 동안 졸업생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문헌으로 그분을 간접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남강 선생은 입지전적 인물로 당신의 몸과 넋을 오산학교와 이 겨레의 제단에 바친 분이시다. 선생은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다.
소년시절 유기점 사환으로 장사를 배운 후 보부상으로 자립하여 마침내 큰 무역상으로 한때 전국의 경제권을 지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나라의 국권을 잃게 되자, 선생은 생업을 접고 고향 정주에서 은거생활 중 마침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선생은 도산의 말씀에 크게 깨우쳐 구국교육(救國敎育)의 깃발을 치켜들고 오산학교를 인수 설립해 나라를 구하고자 인재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제자의 장래를 열어주다선생은 신민회 사건을 비롯해서 숱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구국의 길을 걸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선생은 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고도 항상 입버릇처럼 "나는 무식해, 나는 무식해"라고 말씀하면서 당신은 교주이면서도 오산학교 변소나 푸시고 운동장 풀이나 뽑았다.
학교 살림이 궁핍해 보수를 못해 교실에 빗물이 스며들자 당신 집 기왓장을 벗겨다 갈아 끼우고, 교사들이 봉급 지불이 곤란하자 문전옥답을 팔거나 곳간 쌀을 퍼내 충당케 했다.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은 당신이 한 번도 맡지 않고 다른 분에게 사양했지만, 학생들의 장래 문제에는 남다른 관심으로 지도하였다.
옛 오산 졸업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에는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여 함께 밤을 지내면서 그들의 장래를 열어주었는데, 선생은 학생들에게 교사, 목사, 의사, 변호사가 되기를 권했다.
교사가 되어 이 땅에 우매한 젊은이를 깨우쳐 장차 조국 독립의 힘을 기르게 하고, 목사가 되어 어리석은 민중의 길잡이가 되게 하고, 의사가 되어 병마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들어주게 하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동포 편에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개천절과 '남강탄신일'오산학교에서는 지금도 10월 3일 개천절을 '남강탄신일'로 기념하는 바,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선생의 실제 탄신일은 3월 25일(음력 2월 18일)이다. 일제 때 개천절 기념식은 가져야겠고 그렇다고 버젓이 개천절 기념식을 할 수 없어 선생은 묘안을 냈다.
"학교가 지저분하니 대청소를 합시다."그날은 수업을 전폐하고 학생들과 학교 주변 청소, 마을의 도로 보수, 대민 봉사로 하루를 보낸 후 교직원을 댁으로 초대했다.
"오늘은 내 생일날이니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나 합시다."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거듭되어 개천절이 선생의 탄신일이 되었다고 한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 것도 선생의 힘이 컸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보면서 서명 순서로 난항을 거듭할 때였다.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이 한 마디에 그만 순서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고 한다.
오산 출신들은 한결같이 오산정신을 부르짖는다. 오산정신은 곧 남강정신으로 곧 민족애라 하겠다. 그런 영향으로 오산학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인 김소월·백석, 종교인 함석헌·주기철·한경직, 사학자 김도태, 화가 이중섭, 독립투사 최용건·김홍일 ….
남강 선생은 당신 유해마저 학생들에게 이 민족에게 바쳤다. 그러나 당신의 혼을 두려워했던 일제의 제지로 유해는 비록 땅에 묻혔지만, 당신의 애국 애족의 높으신 정신은 눈 뜬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나동성 교장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