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청난공신이라 불렀다. 그 중 1등공신 홍가신을 기려 세워진 '홍가신청난비'가 홍성읍에 있다. 아산 만전당과 홍가신기념관 앞에는 이 비를 복제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만진
도적의 이름을 딴 지리산 고개
최초의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군은 지리산을 근거로 활동했다. 김희(金希)와 고파(高波)는 수 천 무리를 거느리고 진안, 운봉, 남원, 거창, 안음, 함양 등지를 드나들면서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마구 죽였다. 이들은 거의 3년 동안 기세를 떨쳤는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반군 장수 임걸년(林傑年)은 지리산 험준한 고개 중 한 곳인 임걸령(林傑嶺)에 자신의 이름도 남겼다.
김희, 고파, 임걸년 등은 그래도 규모가 큰 산적떼 수준이었지만, 1594년 1월 15일을 한양 진격일로 잡은 송유진(宋儒眞) 무리는 본격적인 반란군이었다. 송유진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농민들에게 인심을 베푸는 등 백성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세력을 키웠다. 충청병사 변양준의 무사 김응룡이 꾀를 냈다.
김응룡이 "저의 조카뻘 되는 홍곡(洪穀)이 송유진의 종사관으로 있다고 합니다. 이 자를 유인하면 적당의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고 병사에게 계책을 말했다. 속수무책으로 있던 병사는 즉각 김응룡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김응룡은 홍곡을 협박하고 또 설득하여 송유진을 직산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 마침내 체포한다. 홍곡을 신뢰했던 송유진은 이날 약간 명의 부하만 데리고 직산으로 나왔다. 송유진의 거창한 야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반란군의 말만 듣고 유명 의병장을 죽이는 선조선조는 송유진의 반란과 관련하여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을 죽였다. 송유진이 세력을 모으면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우리의 수령은 이(李)가인데 이름은 아직 밝힐 수 없고, 지금 청계산에 머물고 있다" 하고 떠들었는데 그 이가로 이산겸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1594년 1월 1일자에는 '의병장 이산겸이 역적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역적과 대질했을 때 역적의 말이 허황했는데도 이산겸은 오래도록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고 주장하니 선조가 형추(고문)를 명령했다. 그가 고문을 받아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을 고문 끝에 죽인 선조는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도 고문 끝에 죽인다. 이번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계기가 되었다. 송유진의 반란보다 약 2년 6개월 뒤에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은 임진왜란 때 봉기한 여러 반란군 중 가장 규모도 웅대했고, 점령 지역도 넓었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컸다.
1596년 7월 6일, 서얼(첩의 자식)이기 때문에 출세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소 불만이 많았던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선조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을 활용하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좋지 못한 언행을 일삼다가 서울 집에서 쫓겨나 전라도 모속관 한현(韓絢) 아래에서 일하던 이몽학은 그 본인도 서얼 출신이라 불평이 많았던 한현부터 끌어들였다.
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이몽학의 반란반란군은 홍산(부여 홍산면)과 임천(부여 임천면) 관아를 점령하고 현감 두 명을 결박했다.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몰려들어 반란군의 세력은 급속히 불어났다. 반군은 청양(충남 청양읍), 정산(청양군 정산면), 대흥(예산군 대흥면)도 접수했다. 이몽학은 송유진이 썼던 수법을 그대로 재탕했다.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장군이 우리를 돕기로 했다. 병조판서 이덕형도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했다. 전국 다섯 도에서 관찰사들이 한날 한시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한다."이몽학 반란군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북상했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닷새만인 7월 10일 이몽학 군은 수원까지 올라갔다. 이때 이몽학 군의 일부는 홍주(충청남도 홍성)로 진격했다. 홍주군수 홍가신(洪可臣)은 반란군의 공격에 맞설 시간을 벌기 위해 지혜를 발휘했다. 홍가신은 이희(李希)와 신수(申壽) 두 명을 반란군에 보내어 거짓 항복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