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대성당의 오렌지 나무세비야의 겨울은 따뜻하다 못해 덥다. 섭씨 20도에 이르는 날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자라고, 창문에 놓아둔 화분에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부원
지난 해 말 도망치듯 스페인으로 떠났다. 휴가차 떠나는 며칠짜리 해외여행이 아니라, 그곳에서 이번 겨울 한 철을 보내기 위해 무작정 짐을 쌌다. '보러' 간 게 아니라, '살러' 간 것이다. 같은 북반구의 나라지만, 그곳은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일 것만 같았다.
태양과 정열의 나라라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삭막해진 내 삶을 성찰해보고 싶었다. '겨울 공화국'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겨우내 주말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꿋꿋하게 촛불을 들 많은 이웃들에게 죄스러웠지만, 연일 쏟아지는 우울하고 참담한 뉴스로부터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후안무치한 권력자들의 행태에 욱하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게 상책이라는 비겁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배낭 차림의 내 행색을 보니, 흡사 방사능에 피폭당하지 않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시차는 몸을 천근만근 피곤하게 할지언정 먼 타국 땅에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반가운 환영인사다.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탔고, 열두 시간을 날았는데도, 마드리드 바라하 공항은 여전히 짙은 새벽이었다. 태양보다 더 빨리 날아온 비행기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차만큼 외국에 왔음을 실감시켜주는 건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피곤한 여행객을 위한 배려일 리는 없고, 그만큼 당국의 입국 수속 절차가 느슨한 탓이다. 스페인은 현재 여행 유의 국가로 지정되어 있어 입국 수속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터다. 여느 곳 같으면 강압적인 태도로 바지의 허리띠까지 풀게 하는 마당인데 이래도 되나 걱정될 정도였다.
영어가 병기돼 있지 않다니...당황스런 스페인 공항 주변 공항의 칠흑 같은 어둠이 이방인을 포위하고 있다. 그러나 밤의 어둠과 새벽의 어둠은 공기의 맛부터가 다르다. 이내 아침이라는 생각에 초행길의 낯섦과 두려움은 없다. 게다가 늘 그런 곳에는 도움을 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 한 명쯤은 있게 마련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살라망카 대학으로 유학 왔다는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공항에서 동트는 아침 해를 볼 뻔했다.
공항 밖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만,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스페인어 일색이었다.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영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은 공항 주변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공항버스 정류장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건, 글자와 함께 표기된 '그림' 때문이었다. 공항버스 시간표를 봐도, 아라비아 숫자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어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말보다 영어가 먼저 적히곤 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더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슷한 알파벳을 사용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대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 거라는 생각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공항과 기차역의 안내데스크만 벗어나도 영어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외국어'였다. 관광지의 매표소 직원과 가이드 등을 제외하면 한 달 동안 만난 숱한 스페인 사람들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냥 손님을 기다리며 마냥 줄 서 있는 택시를 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타국 생활의 시작부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웬만하면 택시를 타지 않는다는 건 내 오래된 철칙이다. 당장 지갑에 든 돈을 떠올리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그보다 스페인의 장삼이사들 중 선뜻 택시를 잡아타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들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에게 분명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정류장에서 속절없이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방인에게 그 여학생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요일마다 첫 차 운행과 버스 운행 시간이 다르다고 했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버스 시간표를 내 맘대로 해석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게 더 30분을 기다려야 버스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머지 시간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것은 그와 영어로 나눈 즐거운 대화 때문이다. 비록 서툰 영어일지언정 마치 모국어처럼 느껴졌다.
그도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가려던 참이었다. 버스 안 안내방송도 스페인어 일색인 마당에 언제, 어디서 내려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터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 짧은 영어 실력이 부끄러웠는데, 외려 그는 영어가 서투르다며 미안해했다. 스페인에서의 첫 인연인 그는 공부를 위해 마드리드 북서쪽인 추운 살라망카로 가고, 난 따뜻한 남쪽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로 간다.
'난민을 환영한다'는 마드리드 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