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를 방문해 인명진 비대위원장을 만나고 있다.
이희훈
"인명진 비대위원장을 만났더니, 딱 앉자마자 내게 '보수에 속합니까 진보에 속합니까' 질문을 하더라. 이건 적절치 않은 질문 아닌가. 누가 뭐래도 나는 보수다. 그런데 그걸 구분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가 그런 부분에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지난 1일 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인명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향해 노기 띤 비판을 제기했다. 같은 날 면담 자리에서 자신에게 자꾸만 진영 논리를 강요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고도 했다. 2일 <한국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은 이처럼 "어떻게 사람을 진보냐 보수냐 나누나"라며 인 비대위원장을 직접 성토했다.
반 전 총장의 이 같은 심정은 불출마 선언 직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난 참모진들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불출마의 변을 밝히며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 많이 들었다"면서 "말하자면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인데, 정치인이면 진영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결국 인 비대위원장을 겨눈 화살이었다. '보수냐 진보냐'라는 질문은 자신을 '보수의 소모품'으로 취급한 것과 같다는 맥락이었다. 인 비대위원장이 '낙상 주의'를 언급하며 반 전 총장에게 제3지대 구축 대신 입당을 권유한 것에도 불쾌감을 느꼈을 거라는 분석이다. 인 비대위원장은 전날 면담 말미 "나이가 들어 낙상하면 큰일 난다"며 "겨울 철에는 집에 있는 게 제일이라, 최근 낙상 주의로 입장을 바꿨다"며 반 전 총장에게 '낙상 주의'를 권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반 전 총장의 불출마 결정에 인 비대위원장 등 일부 여권 인사들의 진영 논리 강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정우택 원내대표 또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2일 비상대책회의에서 "(반 전 총장에게) 진영 논리를 강요하며 순수한 정치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한 복잡하고 냉정한 정치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인명진 "기자들이 오해한 것 아닌가", 반기문 "당황스러웠다"이에 대해 인 비대위원장은 2일 기자간담회에서 반 전 총장 스스로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에 첨언했을 뿐, "그런 뜻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낙상 주의' 표현에 대해서도 "왜 밖에서 고생하시느냐는 말씀을 드린 것으로, 그 분은 (내 말 뜻대로)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 기자들이 오해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의 비판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 비대위원장은 또 "환멸을 느낀다는 것은 아마 다른 쪽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면서 "저는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비유적으로 말했"을 뿐, 반 전 총장의 진영 논리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