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오브제, 2016
오브제
순례자의 길을 찾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남편을 잃은 아내, 다툼이 잦은 가족, 연인, 대학생, 70대 백발 할아버지, 스페인사람, 미국사람, 멕시코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사람들은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달랐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난 저자는 '어떤 인생이든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일상에 지쳐 찾아온 카미노에서 여행자들은 서로의 파트너가 됐다. 저자는 여정 중에 상한 음식을 먹고 이틀을 앓는다. 이틀 동안 한 걸음도 가지 못한 만큼 서둘러 길을 나섰다. 조급한 마음에 땅만 보고 걷기만 할 때였다.
"이봐, 너무 서두르지마!""어제도 굉장한 속도로 걷고 있던데? 계속 보고 있었어. 오늘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났잖아.""너는 아직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시간에 이끌려가고 있는 거야. 도시의 분주하고 주위 사람에게 좌우되는 그 시간 그대로. 하지만 그러면 몸이 망가지잖아?""도시에서 생활할 땐 자기 리듬에 따라간다는 게 아무래도 어려워지지.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하고. 하지만 이 길은 달라. 서두르든 천천히 가든 어차피 도착할 장소는 같으니까. 서두른다고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소중한 걸 못 보고 지나치게 될 가능성이 커지지. 필요한 건 'Take your time', 그것뿐이야." (57~58쪽)우연히 만난 여행자는 저자를 이렇게 위로했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을 위해, 대학에서는 학점과 스펙을 위해, 취업은 대기업을 향해 달려가는 나에게 가닿는 말이었다. 남들의 파도에 휩쓸려 여기까지 떠내려온 건 아닐까. 지금까지 내 리듬에 따라 선택한 게 있을까. 나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나에게도 'Take your time'(서두르지 마)은 큰 위로가 됐다.
"포르 케 카미노스(왜 이 길을 걷니)?""일을 그만둬서... 다음에는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그만두면 왜 안되는데?""일을 도중에 내팽개치는 건 도망치는 거잖아.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도망치는 게 뭐가 나쁜데!?""나도 사자를 만나면 도망칠 거야! 하지만 고양이라면 도망치지 않겠지. 너한테는 그 일이 사자였던 거잖아. 그렇다면 도망쳐도 괜찮아!" (76쪽)또 다른 여행자는 이렇게 말해줬고 저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것을 강요한다. 상대가 무엇이든 도망친다는 것은 내가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강요는 남이 내게 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하는 강요다.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상대와 내 크기를 비교해보고 맞설 수 없다면 도망쳐도 된다고 말한다.
카미노로 당장 떠나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