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버려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

[서평] 오노 미유키 저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등록 2017.02.20 13:13수정 2017.02.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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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도착하면 이메일에 먼저 답하고. 아,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었지. 빨리 출근해야겠다.' 그녀는 평소처럼 출근하려고 전철을 탔다. 비슷한 옷을 입은 샐러리맨들이 가득했다. 전철은 꽉 찼고 모두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서로를 밀었다.

'점점 더 숨쉬기가 괴로워졌다. 다리는 홈에 푹 박힌 듯 움직이질 않는다. 전동차의 출발을 알리는 벨이 울린다. 몸을 비틀어 짜듯 하며 억지로 한 발을 내디뎠다. 딱딱하게 굳은 양다리는 마음껏 내 명령을 무시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댐이 한번에 무너지듯 한심함이 넘쳐흘러 내 눈물샘에 구멍이 뚫렸다. 전동차는 언제나처럼 냉랭한 얼굴로 출발했다.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는 얼굴이 새파래진 여자를 남겨둔 채로. 정신과 의사는 내게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23쪽)


공황장애는 점점 심해졌다. 곧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초조해할수록 더 힘들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SNS로 보는 입사 동기나 친구는 행복해 보였다. 모두 웃고 있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였다. '나는 이렇게 산산이 조각났는데...'

'인생과 여행에서 짐을 꾸리는 방법은 똑같아요. 쓸모없는 물건을 점점 버리고 나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은 것만이 그 사람 자신이지요. 걷는 것, 여행하는 것은 그 '쓸모없는 것'과 '아무리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을 골라내기 위한 작업입니다. 성지라는 건, 모두 그를 위한 장치죠. 내 인생은 아직 20년 가까이 길게 남아 있는 데 그 사이에 얼마나 필요 없는 걸 버릴 수 있는가로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정하는 것입니다.'(25쪽)

그녀는 학생 때 여행하던 중에 만난 한국의 인류학자 김양주 선생님 말씀을 떠올렸다. '필요 없는 걸 모두 버렸을 때 내게 남는 게 뭘까?' 그녀는 정장을 벗어 던지고, 직장에서 나와, 쓸모없는 고민으로 가득 찬 머리를 비웠다. 그녀는 짐을 쌌다.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오브제. 2016)는 일상생활에서 무너진 저자 오노 미유키가 스페인 순례자의 길(카미노 데 산티아고)을 걸으며 '아무리 버려도 끝까지 남는 것'을 고민한 기록이다.

프랑스 남부 시작 지점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36일 동안 800km를 걷는 여정. 배낭에 조개껍질을 달고 걷는 사람들. 저자와 그 많은 사람은 왜 순례자의 길을 찾았을까.


카미노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오브제, 2016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오브제, 2016오브제
순례자의 길을 찾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남편을 잃은 아내, 다툼이 잦은 가족, 연인, 대학생, 70대 백발 할아버지, 스페인사람, 미국사람, 멕시코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사람들은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달랐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난 저자는 '어떤 인생이든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일상에 지쳐 찾아온 카미노에서 여행자들은 서로의 파트너가 됐다. 저자는 여정 중에 상한 음식을 먹고 이틀을 앓는다. 이틀 동안 한 걸음도 가지 못한 만큼 서둘러 길을 나섰다. 조급한 마음에 땅만 보고 걷기만 할 때였다.

"이봐, 너무 서두르지마!"
"어제도 굉장한 속도로 걷고 있던데? 계속 보고 있었어. 오늘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났잖아."
"너는 아직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시간에 이끌려가고 있는 거야. 도시의 분주하고 주위 사람에게 좌우되는 그 시간 그대로. 하지만 그러면 몸이 망가지잖아?"
"도시에서 생활할 땐 자기 리듬에 따라간다는 게 아무래도 어려워지지.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하고. 하지만 이 길은 달라. 서두르든 천천히 가든 어차피 도착할 장소는 같으니까. 서두른다고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소중한 걸 못 보고 지나치게 될 가능성이 커지지. 필요한 건 'Take your time', 그것뿐이야." (57~58쪽)

우연히 만난 여행자는 저자를 이렇게 위로했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을 위해, 대학에서는 학점과 스펙을 위해, 취업은 대기업을 향해 달려가는 나에게 가닿는 말이었다. 남들의 파도에 휩쓸려 여기까지 떠내려온 건 아닐까. 지금까지 내 리듬에 따라 선택한 게 있을까. 나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나에게도 'Take your time'(서두르지 마)은 큰 위로가 됐다.

"포르 케 카미노스(왜 이 길을 걷니)?"
"일을 그만둬서... 다음에는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
"그만두면 왜 안되는데?"
"일을 도중에 내팽개치는 건 도망치는 거잖아.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
"도망치는 게 뭐가 나쁜데!?"
"나도 사자를 만나면 도망칠 거야! 하지만 고양이라면 도망치지 않겠지. 너한테는 그 일이 사자였던 거잖아. 그렇다면 도망쳐도 괜찮아!" (76쪽)

또 다른 여행자는 이렇게 말해줬고 저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것을 강요한다. 상대가 무엇이든 도망친다는 것은 내가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강요는 남이 내게 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하는 강요다. 순례자의 길에서 만난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상대와 내 크기를 비교해보고 맞설 수 없다면 도망쳐도 된다고 말한다.

카미노로 당장 떠나야 하는 이유

 순례자임을 뜻하는 조개껍데기를 단 배낭
순례자임을 뜻하는 조개껍데기를 단 배낭오브제

이 책의 1부에 저자의 경험이 담겼다면 2부는 실용적인 팁을 담았다. 상대적으로 시간은 여유있고 돈은 없는 대학생에게 추천하는 코스, 돈은 있지만 휴가 기간이 짧은 직장인에게 추천하는 코스, 체력이 부담되는 노인에게 추천하는 코스에서부터 식비, 숙박비까지. 예를 들면 가장 저렴한 여정을 선택하면 하루 15유로(현재 약 18,000원)로 여행할 수 있다. 마을마다 추천하는 맛집도 소개한다. 카미노에 관한 배경지식도 빼놓지 않는다.

평범한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7가지 매력
- 숙박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 밥이 맛있고 저렴하다
- 전 세계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관을 접할 수 있다
- 최적의 다이어트 코스! 날씬하고 건강한 몸으로 탈바꿈한다
- 세계유산으로 가득한 축복 받은 길!
- 어학 능력이 쑥쑥
- 나 자신과 대화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잠깐이나마 설렜다. 저자와 나의 고민이 비슷해서 저자가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건네는 말이 나를 향한 위로의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순례를 마치고, 그녀는 버리고 버려도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임을 깨달았다. 나에게 다 버리고 끝까지 남는 무언가는 뭘까?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포르 케 카미노스(왜 이 길을 걷니)?"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오브제(다산북스), 2016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오노 미유키 #스페인 #카미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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