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지금에라도 철저히 조사하고 기록해야"

배석만 고려대 연구교수, '인천의 군수기지화' 주제로 강연

등록 2017.03.06 11:39수정 2017.03.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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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는 일제강점기에 인천에서 벌어진 강제동원과 관련한 역사 강연회를 두 차례 연다. 첫 번째 강연은 지난달 28일 오후 7시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교육실에서 열렸다. 배석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 교수가 '인천의 군수기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일본이 1930년대 후반 인천에 공장지대를 건설하고 이를 군수기지로 만들었던 과정과 함께 노동자 강제동원의 양상과 피해 상황을 살펴봤다. 아래는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기자 말

  배석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인천의 군수기지화’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배석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인천의 군수기지화’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김영숙

인천, 근대화 문물이 많이 들어온 곳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위치한 조선 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1937년에 설립됐다.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 끝까지 싸울 각오를 할 때였다. 일본에 군수공장 5개를 만들 때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조선 기계제작소를 만들었다. 인천 부평에 조병창이 있어서 가능했다. 당시 민중들의 놋그릇도 빼앗아 모았을 때라 가장 많은 원료를 갖고 있었다.

인천이 처음부터 군수기지는 아니었다. 인천에는 일본이나 서구의 신기한 근대문물이 많이 들어왔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라는 말이 있는데, 인천에 처음으로 탄산을 넣은 단 음료인 사이다가 들어왔다. 기록을 보면, 1905년 히라야마 마쓰타로라는 일본인이 중구 신흥동에 사이다 공장을 세웠다. 당시 식혜나 수정과 등을 마시던 사람들에게 사이다는 새로운 문물이었다.

인천은 근대화의 선봉인 경인공업지대의 핵심이다. 경인공업지대는 1960~70년대 전국 최대 공업지역이었다. 다른 공업지대와 달리 균형을 갖춘 공업단지였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남동임해공업지대는 중화학공업단지다. 경인공업지대는 모든 게 다 있다. 간장공장도 있고 정미소, 성냥공장, 고무신공장에서부터 중공업 공장인 조선 기계제작소까지 있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인천의 동일방직도 1932년에 만들어졌다. 동구 배다리마을인 금창동에 집중적으로 공장들이 들어섰다.

서울이라는 배후도시가 있고 교통망이 갖춰졌으며 서해를 항해하는 모든 배가 인천항과 연결돼 노동력을 구하기 쉬웠다. 당시 서울에 조선총독부가 있어서 행정 처리를 하기에도 용이했다.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행정기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편했다.

 해방 후 일본군 조병창에 주둔한 주한미육군참모본부(에스컴).
해방 후 일본군 조병창에 주둔한 주한미육군참모본부(에스컴).김영숙

인천, 군수기지화의 핵심지역


오늘 주제가 '군수기지화'다. 193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공업화 정책을 본격화할 때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37년 중일전쟁 전까지는 모든 공업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데 종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기업이 정부정책에 맞춰 알아서 눈치껏 행동했다. 가령 고무신을 만드는 공장은 군화를 만드는 공장으로 변모했다.

그러다 1930년대 후반에는 군수물자가 아닌 직접 무기생산이나 부품생산 또는 무기와 관련된 공업(철강, 금속, 주물, 기계 등)으로 전환한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939년에 부평에 조병창을 건설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공업화를 일본을 보조할 정도의 생산력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 닛산 등의 일본 기업이 만주로 진출했다. 조선총독부는 그때부터 조선의 병참 기지화를 고민했다.

일본이 두려워했던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와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걸 담당하는 게 관동군이었다. 러시아와 싸울 수 있는 병참기지를 조선에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물이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인천의 조병창 관련 논문이 한 편도 없다. 연구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조병창에서 다 만들진 않았다. 하청을 주기도 했다. 부평의 역사가 파란만장하다. 자동차산업의 시발지가 부평이다. 현 한국지엠에서 당시 군용트럭을 만들었다. 1940년대 초반이라 기술이나 원료의 한계가 있어, 대량생산을 하지는 못했다. 그때 일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남아서 자동차 1세대 엔지니어가 됐다.

인천의 군수 기지화는 인천 조병창으로부터 시작됐다. 1930년대 우리나라에 광산 개발 붐이 일었다. 금광은 물론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마그네사이트 등, 특수 광물로 확대됐다. 당연히 채굴하는 기계들의 수요가 많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장이 인천의 조선 기계제작소다. 이때부터 급속도로 군수 병참 기지화가 진행된다.

전 지역에 군수 공업화가 이뤄지는데 인천은 조병창이 있어서, 특히 군수 공업화라고 보기보다는 군수 병참기지로 보는 게 합당하다. 조병창은 1939년 건설돼 1941년부터 가동됐다. 그때부터 청장년을 모아 교대로 합숙시켜 일하게 했다.

강제징용, 지금에라도 철저히 조사하고 기록해야

강제동원을 처음부터 했던 건 아니다. 초기에는 공장을 설립하니까 인근 지역에서 노동하려고 많은 사람이 몰렸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갈 자유가 없이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해야 했다.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는 것보다 고국에서 징용된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징용자가 많아지기도 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갑자기 노동자가 많이 모이니까 주거문제가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평 삼릉의 미쓰비시 줄 사택, 동구 만석동 쪽방촌, 부평 신촌 등의 조병창 사택이 생겼다.

징용이 얼마나 됐는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건 없는데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의하면 2만여 명이라는 말이 있다. 최근 인천대 교수의 연구발표를 보면, 1만 명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가 설치되고 140여 명이 신고했다. 훨씬 전에 해야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자식들이 부모의 징용 사실을 몰라 신고하지 못했다. 학자로서 부끄럽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조사해 기록해야 한다. 이들을 기리는 작업은 일회성 행사가 돼서는 안 된다.

조선 기계제작소에서 처음에는 민간 광산용 기계를 만들다가 군수용 부품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잠수함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천이 급속히 군수 기지화가 된 것의 시작은 조병창 건설이다. 관련해서 회사가 설립됐고, 기존 회사들도 하청을 받아 군수공장이 됐다. 단기간에 이뤄졌다. 중심지는 조병창이 있던 부평이었고, 동구 만석동 조선 기계제작소 등으로 벨트가 형성됐다.

인천 조병창이 해방 후 에스컴(ASCOM. 부평미군기지)이 됐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인천은 군수기지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사택들은 기지촌으로 바뀐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감추는 게 능사가 아니다. 역사의 밝고 어두운 면을 다 밝혀야 한다. 판단은 그 세대가 한다.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일제강제징용 #배석만 #조선기계제작소 #에스컴 #조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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