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족이 거주하는 라카인주 북부 사진로힝야족이 오래전부터 거주했던 방글라데시 국경과 미얀마 라카인 주 북부 사진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미얀마 원주민 출신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들은 1948년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거대 토목공사의 인력으로 투입한 이주노동자로, 독립하면서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카인주에 눌러앉은 불법 이주자라는 것이다.
즉, 미얀마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실제로 1982년 미얀마의 네윈 정부는 시민권법 개정을 통해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이들은 무국적 상태이다. 실제 아디(ADI)가 인터뷰한 48명 피해자 모두는 미얀마 시민권이 없다고 증언했다.
"세계에서 가장 박해 받는 민족"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 역사는 길다. 로힝야족은 영국 식민지배 당시 불교도인 버마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치독립에 유리한 행보를 걸었다. 다른 소수민족과 유사하게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이들의 무장투쟁도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버마족 중심의 군부와 지배층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로힝야족 전체를 박해했다. 또 라카인족과의 분쟁을 방관하거나 이를 빌미로 로힝야족을 탄압했다. 1978년, 미얀마 정부는 무슬림 반군토벌을 명분으로 내건 킹드래곤 작전으로 로힝야족 20만 명을 방글라데시로 몰아냈고, 1991년에는 25만 명을 몰아냈다. 2012년에는 라카인 소수민족과의 충돌로 최소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여 명이 격리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부 로힝야 청년이 불교도 여성을 강간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라카인 불교도들이 로힝야족을 보복 공격하면서 격화되었다. 미얀마 전역에 반무슬림 정서의 확산은 물론, 불교도 극우주의 세력 주도의 혐오 발언이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됐다.
로힝야족에 대한 억압은 사회 구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로힝야족은 국적을 받을 수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인근 지역 방문도 허가를 받거나, 통행료 등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결혼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직업을 구하는데 제약이 있고, 공직에는 나갈 수 조차 없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2016년 10월 미얀마군의 로힝야족 토벌작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수천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인근 해역을 떠돌았다. 군부는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이 불교도 버마족의 이익과 직결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로힝야족 무슬림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 됐다.
미얀마군에 의한 로힝야족 학살 사건의 전개2016년 10월 9일, 칼, 새총, 30여 개의 소총 등으로 무장한 로힝야족 수백 명이 라카인주 북부 마웅도우(Maungdaw)에 위치한 경찰서 1곳과 경찰초소 2곳을 습격했다. 무기고의 총기 62정과 탄약 1만 발이 이들 손에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교전으로 미얀마 경찰 9명이 사망했다.
국제 위기감시기구인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 ICG)'에 따르면, 습격을 주도한 소수의 핵심세력은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등지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고 한다. 방글라데시를 통해 잠입했으며, 지역민들의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라카인 민족과의 충돌 사태를 겪으며 절망에 빠진 지역민들이 동참한 것이다. 이들은 이슬람 성전(지하드)을 표방하지 않고 로힝야족의 박해를 종식하는 것을 가시적 목표로 삼았다.
미얀마 군부는 습격사건 이후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관련자 색출, 무기회수, 조력자 체포 등을 위해 마웅도우 지역을 완전봉쇄 했다. 군부의 오랜 전략으로 무장세력의 식량, 자금, 정보, 징집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작전은 군대와 국경경비대(BGP)의 공동으로 수행됐고 300~2000여 명 단위의 군인들이 소규모로 나뉘어 마을 전체를 수색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작전은 자정, 새벽, 점심 등 시간에 무관하게 2-3일에 한 번씩 또는 많게는 하루에 4번까지도 진행됐다.
로힝야족을 집단처벌하고 방글라데시로 쫓아내려는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