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학생의 등굣길
이준석
13년 전, 나는 고등학교 행정실로 발령을 받았다. 행정실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학생들에게 수업료와 급식비, 특기적성비를 징수하고, 교사와 행정실 직원 급여를 지급하는 일이었다. 날마다 정산해야 할 장부와 서류가 넘쳐났다. 나보다 먼저 학교에서 일하던 동기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하며 겨우겨우 일을 배워나갔다.
몇 달 후 일이 익숙해질 무렵,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미수납자였다. 이 고등학교는 고급 아파트단지 옆, 이른바 잘사는 동네에 있었다. 가계가 어려운 집도 있었겠지만, 학비 지원제도가 있어 미납자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름방학 무렵 내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부터 이미 학비가 밀린 학생이 있었다. 1학년인 그 아이 이름은 연수(가명)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미납자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2학기가 되자 연수는 수업료뿐 아니라 급식비도 밀리기 시작했다. 학부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빚 독촉 때문에 전화도 받지 않던 학부모담임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는, 엄마가 오랫동안 병을 앓아 아버지가 직장까지 그만두고 간병했지만 결국 작년에 돌아가셨고, 병원비로 전 재산을 다 쓴 것도 모자라 빚을 많이 졌다는 것이었다. 빚 독촉 때문에 아버지는 모르는 번호의 전화는 아예 받지 않는다며, 먼저 문자로 신분을 밝힌 뒤 핸드폰으로 전화하라고 했다.
담임 말대로 하니 정말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목소리는 작고 기운이 없었다. 통장 거래가 중지되어 돈을 내지 못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현금으로 내면 된다는 말과 함께 2/4분기와 3/4분기 수업료 70여만 원도 미납되었음을 알렸다. 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연수가 행정실에 왔다. 삐쩍 마른 손에는 급식비만 들려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 건넸다. 4/4분기 수업료 징수가 시작될 무렵 다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아버지는 살기가 어렵다고 했다. 다시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미납된 수업료는 학교로서는 골칫거리였다. 이를 징수하는 게 내 몫의 업무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내년 초 학비감면대상자에 연수를 포함시키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학비감면대상이 되면 이전에 미납된 수업료도 한꺼번에 감액이 된다. 이 생각을 하니 속이 시원해졌다.
드디어 새 학년이 시작해 학비 지원 신청서를 전교생에게 발부했다. 그런데 연수의 신청서가 오지 않았다.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는 "신청서를 읽어봤다. 그런데 조건이 안 맞는다. 내 이름으로 된 전월세 계약서가 없다. 아이는 고모 집에서, 나는 일터에서 먹고 잔다. 그리고 월급도 기준(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27만 원 미만 정도로 기억한다)에 맞지 않는다. 내 월급은 130만 원이고 명세서도 없다. 대부분 빚을 갚는 데 쓴다"고 말했다.
학비 감면 받을 길이 생겼지만...당시 교육청에서는 IMF 이후 어려워진 경제 사정을 고려해 엄격한 기준 대신, 집이 없음을 증명하는 전월세계약서나 3개월 치 급여 명세서 등 간단한 서류로도 학비감면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연수네는 집 계약서가 없었고, 급여는 기준보다 몇 만 원 많았다. 나는 허탈하게 전화를 끊었다.
집에 가서도 내내 그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처음엔 미납자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점점 연수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고작 몇 만 원 때문에 미납자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한다니.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야 할 아버지가 너무 무력한 듯해 화도 났다.
밤을 새우다시피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청서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 저는 문서로 확인할 뿐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126만 원이 적힌 급여명세서입니다. 정해진 양식은 없어요. 회사 직인이나 사장 도장이 찍혀 있으면 됩니다. 급여 담당 직원이나 사장에게 얘기하면 알아서 해 줄 거예요." 아버지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던 그는 "저기... 그래도 됩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말씀은 못 드립니다. 저는 문서로 확인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다음 날, 황토색 골덴 자켓을 입은 남자가 행정실 문을 열고 나를 찾았다. 연수와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급여명세서엔 정말 126만 원이 적혀 있었다. 나는 "수업료 감면자는 급식비와 특기적성비도 감면되니, 앞으로 수학여행비 정도만 내면 된다"고 말했다. 아버님은 별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행정실을 나갔다.
1년 후인 이듬해 2월, 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정해진 일을 원칙대로 처리해야 하는 공무원이라는 자리가 나와 맞지 않았다. 완전히 소진된 느낌이었다. 어렵게 공부해 합격한 공무원이었지만 그리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학교에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나는 연수 아버지에게 1년 만에 전화를 했다. "작년처럼 이번 3월에도 꼭 학비 감면신청을 하시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고맙다고 했다.
가난을 서류로 증명하라는 국가공무원으로서, 급여명세서 위조를 눈감았던, 아니 오히려 조장한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덕분에 연수가 학비감면을 받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애써 생각을 해보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몇 년 전 교육감 선거에서 무상급식 공약이 나왔을 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연수와 연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필요한 비용을 국가가 부담했다면, 연수가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가난의 부침을 덜 겪었을 것이다. 아픈 가족을 정성껏 간병한 끝에 남은 가난과 슬픔. 국가는 오직 서류로 증명된 가난을 원한다. 무너진 가슴과 슬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나는 이런 국가를 거대한 사이코패스 같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보장되지 않는 나라. 마흔이 넘은 내게도 이런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점점 짙어진다. 사는 동안 나는 투표로 내 목소리를 낼 것이다. 이번 대선에도 공약을 꼼꼼히 살펴 조금이라도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 한다. 그리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인간적인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서 무수히 지나쳐온 수많은 연수들과 그 앞에 무력했던 나를 위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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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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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사문서 위조, 여전히 날 괴롭히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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