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가 여성살해에 무관심했기에 상황이 더 나빠졌음을 보여주는 타임라인 배치.기사 왼쪽에는 여성들이 살해당한 날짜가, 오른쪽에는 의회에서 관련 법안이 무산된 과정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포스트앤드큐리어> 온라인 기사 갈무리
기자들은 주 의회에 펜 끝을 겨눈다. 웹페이지에서 스크롤을 내리면, 오른편으로는 의회의 활동 타임라인을, 왼편으로는 같은 시각 죽어나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볼 수 있다. 이 타임라인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주 의회에 제출되고 하원 법사위에 넘겨지는 동안에도 10명이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주 의회는 여성들에게 '왜 남성을 떠나지 않았느냐'며 책임을 돌리기 급급했다. 가정폭력범들에게서 총기를 빼앗는 조항은 법안에서 삭제됐다. 총기소유권을 옹호하는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인 탓이다. 초범 가정폭력범의 투옥 기간도 단축됐다. 이후 데이트 폭력으로 재판을 받고 풀려난 남성이 연인에게 또다시 주먹을 휘둘러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범인 놓아주는 법, 폭력 방조하는 문화기사는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적 문제점도 짚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바이블 벨트'라 불릴 만큼 기독교 색채가 강한 주다. 가부장제와 기독교가 융합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특유의 문화가 가정폭력을 용인하는 토양이 된 것 아니냐는 게 기자들의 지적이다. 예컨대 목사들은 가정폭력을 문제 삼기보다는, 재결합을 위한 화해를 종용한다. 해결책은 결국 공동체의 변화다. "이건 법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는 한 취재원의 말을 기사는 힘주어 강조했다.
4장에서는 가정폭력범 배우자를 떠나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심리상황을 조명한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못 떠난다. 기사는 여성이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5장에서는 사법 절차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통일된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주요 증거나 위험 신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해자가 있는 법정에서 증언하길 꺼린다. 증거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소되더라도 피의자가 낮은 형량을 받을 것이란 사실이 피해자들의 두려움을 더 키운다.
6장과 7장에서는 가정폭력이 결국 사회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제도를 손보면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사람들은 가정폭력이 개인의 분노조절 장애에 따른 것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이 폭력을 쓰는 이유는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더 이상은 안 돼(Enough is Enough)'다. 인터렉티브 기사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폭력 피해자들의 증언, 그들의 퉁퉁 부은 얼굴과 멍든 몸, 적나라하고 끔찍한 상황 묘사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다짐을 독자의 마음에 새긴다.
여성살해·가정폭력 심각한 한국, 심층 보도는 안 보여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지난 2013년 한국일보는 가정폭력 실태를 담은 '안방의 비명' 기획을 내놓았다. 가정폭력 범죄를 '집안일'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사회 분위기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좋은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동폭력까지 가정폭력에 넣어 포괄적 논의를 하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성 언론은 아니지만, 세계비정부기구(INGO)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가 2015년 <오마이뉴스>에 '여성살해를 중단하라'는 연재기사를 여섯 차례 기고한 일도 있다. 시민단체에서 직접 피해 여성들을 상담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성살해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고, 현행 법 제도의 한계를 짚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사였다.
최근 들어 데이트 폭력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기성 언론도 늦게나마 여성살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여혐사회' 속에 산다' 기획기사를 세 차례에 걸쳐 내놓았다. 시민들의 경험담과 전문가 진단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문화를 돌아보는 기획이었다.
<경향>은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포스트잇 메시지'를 기록해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 포스트잇>이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시민의 목소리를 잘 담아낸 기획이었지만, 데이트 폭력이나 여성살해의 현실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탐사보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2014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114명에 이르렀다. 거의 3일에 한 명꼴로 살해된 셈이다. 살인 미수를 경험한 여성도 95명이나 됐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거나, 경찰서에 접수조차 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여성살해 현상은 더욱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 비해 대안은 마땅치 않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있지만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3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 절반 이상(58.3%)은 경찰 신고 뒤 법적 조치를 받지 못했다. 검찰로 넘어가더라도 10건 중 6건은 재판 청구 없이 사건을 종결하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포스트 앤 큐리어>의 집요한 보도는 지역사회를 바꿨다. 2016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여성이 남성에게 가장 많이 살해당하는 주'라는 오명을 벗었다. 지금은 5번째로 등수가 내려갔다. 언론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우리는 언제쯤 한국판 탐사보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를 볼 수 있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