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중고서점 통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이.
이정혁
대형 서점이 대형 도서관이 되어 가는 문제는 책 유통의 모순 구조를 잘 드러낸다. 대형서점들을 중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들을 아예 마련해주고 있다. 실내 공간도 문화공간으로 디자인하여 독서에 최적화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런 조치에 대한 대형 서점의 취지는 이용자들이 서점 공간에 머물면서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취지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출판사들인데 생색은 대형서점이 내는 꼴이다. 무엇보다 이 책들은 서점들이 구매한 것이 아니다. 매절안 한 것이 아니라 위탁한 것이다. 자기 소유도 아닌 책을 이용자들에게 마음대로 읽히게 한다. 읽는다고 하여 구매를 한다는 조건도 없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러한 책들을 그대로 반품 시킨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이 만졌으니 책 상태가 당연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서점의 책임은 없다. 최종 팔리지 않으면 출판사에 보내고 새책으로 달라고 하면 그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모르는 이용자들은 서점들을 칭찬한다. 물론 그 책을 쓴 저자나 출판사에 대한 감사는 없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상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저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연구나 사유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마음도 크다는 점은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서점의 행태들은 도서 대여점만도 못하다. 차라리 도서대여점은 자신들이 책을 사기라도 한다. 책 전체를 구매해서 매장에 전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면 최소한 일정 부수 이상은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매장에 전시하는 책들 정도는 구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출판 생태계라는 거대란 담론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창작자나 제작한 이들에 대한 상도상의 예의일 것이다. 대형 헌책방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다루는 책들을 만든 저자나 출판사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더구나 다른 상품도 아니고 책을 다루며 돈을 버는 이들이 더 무도한 짓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조선시대처럼 농자천하지대본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생산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조는 문화 분야에는 더욱 맞지 않는다. 문화의 본래 기원은 재배하다 양육하다이다. 농사나 목축에는 단계와 과정이 있다. 그런 오랜 동안 노고를 통해 만든 생산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런 원칙들은 너무나 간단히 무시되고 있으며 문화 영역까지 궤멸시키고 있다. 어떻게든 유통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자가 승자라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고 이제 사회의 영혼과 양식을 담아내는 출판에도 예외가 없어졌다. 더구나 대규모 상업농에 해당하는 대형출판사에 비해 열악한 소농들인 작은 출판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형국은 심화되고 있는 데 말이다.
당연히 서점도 중요하다. 책을 만들었어도 독자들과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성사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서점이 한다. 서점과 출판사 그리고 저자가 같이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각기 서점이나 출판사, 저자를 개별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서는 출판 자체가 힘을 얻지는 못한다. 이에 출판계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관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없어도 출판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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