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2016년 5월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이희훈
강남역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되었을 때, 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게 된 것이다. 여성이 아직도 차별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령 차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누구나 능력만 있다면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울창한 삼림은 아닐지라도 햇볕 내리쬐는 풀밭쯤은 된다고, 적어도 나는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는 거라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줄곧 사막이었음이 이제야 두 눈에 들어왔다.
나 혼자만의 변화는 아니었다. Yourlife(@hs_abab) 선생님의 주도로,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같은 문제의식을 나누는 선생님들이 '초등성평등연구회'의 이름으로 모였다. 주말이면 모여 몇 시간씩 토론하며 성평등한 교육의 방향을 고민하고 수업 자료를 개발했다.
아이들의 변화로부터 느끼는 희망과, 어른들의 편견과 아집으로부터 느끼는 좌절이 수없이 교차하는 과정이었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의 기준이 성별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폭력적이라는 것, 타인을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에 맞서야 진정한 정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금세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수업에 대한 글마다 맥락도 없이 쏟아지는 '우리나라에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여성이 임금과 승진에 차별을 받고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에 동시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 모든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연구회 활동은 나에게 힘을 주는 일이었다. 연일 보도되는 여성 대상 폭력이나 미디어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만연한 차별과 혐오의 언어들에 지치고 화가 날 때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위해 미약하게나마 노력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매일을 분주하게 보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