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살인죄·강간죄·강도죄처럼 양국 법률에 똑같이 처벌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어느 나라가 재판권을 가질까? 이 점은 22조 3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의 재산·안전이나 미군 구성원 혹은 미군 가족의 신체·재산에 대한 범죄(A), 공무 중에 발생한 범죄(B)에 대해서는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기타 범죄(C)에 대해서는 한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B에 대해 미국이 무조건 재판권을 갖는 게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무와 무관하게 벌어진 범죄일지라도, 미군이 공무수행 중의 행위로 인정해주면 미군 범죄자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빠져나갈 소지가 크다.
그런데 A에 대해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 것은 언뜻 보면 크게 불합리하지 않다. 예컨대, 미군이 한국 땅에서 동료 미군을 살해하는 행위는, 살인을 금하는 한국 형법을 위반하는 행위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도 한국 법원이 마땅히 재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미군이 우월적 지위를 갖고 한국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그런 미군 범죄자를 한국 법정에 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어차피 미군 상호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국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재판권을 갖는다 해도 우리 국민들이 크게 분노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C다. C는 공무에서 벗어난 미군이 한국인을 상대로 살인·강간·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대한 것이다. 소파협정 제22조 3항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대한 처벌규정이 미국 법률에도 있고 한국 법률에도 있더라도 한국 법원이 1차적으로 재판권을 갖는다. 지극히 당연한 규정이다.
하지만 C에 관한 소파협정 제22조 3항 역시 합의의사록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군이 요청을 하면 한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재판권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미군 범죄자가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리한 소파협정과 합의의사록을 종합하면, (1)미군이 미국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는다. (2)미군이 한국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 (3)미군이 한·미 양국 법률에 의해 모두 처벌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 그 범죄가 같은 미군에 대한 것이거나 공무 중에 벌어진 일이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고(3-1) 그 범죄가 한국인에 대한 것이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하면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3-2).
결과적으로 미군 범죄자는 어느 경우에도 한국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길이 있다. 한국인을 상대로 살인·강간·강도 등의 흉악 범죄를 저질러도 무사히 빠져나갈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불합리성은 조선과 일본 간에도 있었다. 1875년 강화도조약이 바로 그 증거다. 정식 명칭이 조선일본수호조규인 이 조약은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강요한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범죄를 범하더라도 조선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규정했다. 조약 제10조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개항장에 체류하는 동안에 조선국 인민과 관련된 범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본국 관리가 재판한다."이 규정 덕분에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미군 병사들처럼 조선인들한테 안하무인격으로 함부로 대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소파협정과 부속문서들은 강화도조약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소파협정과 부속문서들이 현대판 강화도조약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