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 중앙고 교정에 세워진 남정현 문학비 앞에서. 문학비에 '민족자주를 열망한 분지의 작가'라고 쓰여 있다.
남정현
<분지>가 없었다면
그 당시 <분지>를 읽은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분지>가 없었다면 한국의 소설 문학사는 얼마나 궁핍했을까"이다. 어쩌면 궁핍하고도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발표된 소설 <분지>는 미군, 핵무기라는 소재를 등장시켜서 민족자주 의식을 강조하는 놀라운 풍자 소설이었다. 표피가 아닌 심층의 근본모순을 보여주는 희귀한 소설이었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 문제를 이보다 더 본질적으로 다루면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지금은 돌아가신 이기형 시인을 통해 남정현 작가를 대학로의 한 음식점에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은 매우 허약한 체질과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분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림프 결핵에 시달리고, 1974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심신이 허약해진 남 작가는 병원 약에 의지해서 지내고 있었다.
그 뒤 15년이 지나 남정현 작가를 다시 만났다. 2014년 초, 나는 평생 통일 운동에 힘써온 지식인을 인터뷰해서 <분단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책을 썼는데, 남정현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이제 팔순의 나이를 넘어선 남 작가는 예전보다 더욱 기력이 달려 보였다. 머리가 항상 어지러워서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근본모순을 타파하고자 하는 작가 정신은 한 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분지>를 쓸 때와 변함없는 '결사항전'의 정신이 느껴졌다.
홍길동 10대손 홍만수를 닮은 남정현 작가그때 열정적으로 북미 정세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남 작가를 보면서 <분지>의 주인공, 홍길동의 10대손인 홍만수가 떠올랐다. 미국의 엑스 사단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동원해 포위하자 향미산(向美山)에 숨어 홀로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홍만수.
미군의 공격 10초를 앞두고, 미군에게 강간당한 뒤 자살해 죽은 어머니를 향해 마지막으로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 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라고 외치는 자신만만한 홍만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남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도 강렬한 눈빛으로 문학가의 책임감에 대해 이런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사실 <분지>의 주제였던 외세 문제와 <분지>를 유죄로 몰고 간 국보법(반공법)이 그때나 이때나 괴력을 발휘하기는 똑같아. 한마디로 분지는 아직도 똥의 나라야."
"요즘 나의 귀에는 뭔가 거대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굉음 같은 것이 들린단 말이야.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곧 무너져 내리는 굉음.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을 이루면, 세계 문명의 축이 바뀌고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축이 된다는 것이 내 믿음이야. 하하하.""나는 정녕 미국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를 한번 살아보고 싶은 소망에 항시 우리 시대에 대한 간절한 비원을 안고 무작정 소위 그 글을 쓰는 길에 들어섰어. 국보법 철폐, 미군철수, 북미평화협정, 남북평화통일이 우리의 근본문제야. 작가들은 이런 역사적 과제와 함께하는 초병이 돼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