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은 '이만보', 걷다보니 발톱까지 빠졌어요"

[김경년의 I.인터뷰.U] 성북동 마을코디 박예순 주무관

등록 2017.07.03 09:42수정 2017.07.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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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주민센터 마을코디 박예순 주무관이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성북동 주민센터 마을코디 박예순 주무관이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이희훈

지난 2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 북정마을 경로당. 마당 툇마루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던 할아버지 두 분의 얼굴에 반가운 손님을 맞은 양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요새 왜 그렇게 안 나오셨어요?"
"에유, 더워서 어디..."
"어젠 비도 와서 시원했는데 좀 나오시지."
"비가 오니까 또 못 나온 거지."
"아, 그랬구나. 그래도 좀 나오시면 좋을텐데..."
"알았어. 나올게. 나온다구."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딸의 정겨운 대화 같은 이 광경은 경로당 공예교실에 나오길 권유하는 동주민센터 공무원과 마을 어르신들의 대화다. 자꾸 나오라고 하니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권유하는 공무원은 성북동 주민센터 '마을코디' 박예순 주무관(39). 마을사업을 담당하는 성북구 6명의 마을코디 가운데 1명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피폐해진 마을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사업이 마을사업이라면, 그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 마을코디다.

성북동은 일부 부유층이 살고 있는 지역을 제외하면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개발이 안 된 곳이 많다. 특히 북정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린다.

낙후된 지역이 많다 보니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과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주말이면 카메라를 둘러맨 사람들이 얼마 안 가 사라질지도 모를 모습을 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박예순 주무관이 28일 북정마을 노인정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박예순 주무관이 28일 북정마을 노인정에서 만난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이희훈

젊은이 사라진 동네에 활력소... "한번 만난 주민은 누구나 기억"

박예순 주무관의 주 업무는 이같이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다.


동네를 돌다 보면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인사하느라 정신없다. 수퍼 할머니도 로또가게 할아버지도 모두 오래 본 가족인 양 반갑게 손을 흔든다. 젊은 사람 찾아보기 힘든 동네에 박 주무관의 존재는 활력소 그 이상이다.

경로당 어르신들은 "저렇게 매일 웃는 얼굴로 찾아와서 우릴 보살펴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반가워한다.

정희찬 성북동 동장은 "(박 주무관이) 한 번 만난 주민들은 누구나 다 기억한다"며 "그래서 주민들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항상 같이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성북동에서 박 주무관은 '이만보'로 불린다. 하루 이만보 이상 걷는다는 의미다.

"처음 마을코디로 와 보니 주민들이 마을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맨 먼저 내가 하는 일을 알리고 소개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건강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무조건 걸었어요. 상가 문을 하나씩 두드려가며 주민들을 만나갔지요."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만보기 앱에 매일 2만보가 넘게 찍혔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다녔더니 멀쩡했던 발톱까지 빠졌다. 이 얘기를 들은 같은 마을코디들이 '이만보'란 별명을 지어줬고 박 주무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

 박예순 주무관이 북정마을 경로당에서 공예교실에 참여한 어르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예순 주무관이 북정마을 경로당에서 공예교실에 참여한 어르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이희훈

"꽁꽁 닫혀 있던 주민들의 마음에 변화가 느껴져요"

박 주무관이 마을코디를 하게 된 것은 2년 전 서울시가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24명의 마을코디를 뽑아 4개 구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두 아이를 가진 평범한 주부이면서 경력이라곤 마을기업에서 성북구 역사문화를 설명하는 '엄마는 해설가' 활동을 했던 게 전부였던 그는 마을코디에 응모해 어엿한 공무원이 됐다.

그가 맡은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마을계획단'을 꾸리는 일. 우리 마을을 좋은 마을로 바꾸는 일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 주민 71명으로 시작했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달라진 게 뭐냐는 질문에 "꽁꽁 닫혀 있던 주민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수줍게 말했다.

"처음엔 문을 두드리기도 어려웠어요. 이젠 골목에 꽃을 심는 마을계획단 사람들과 함께 주민들이 길바닥에서 감자를 삶아 먹기도 하고 집에 초청하기도 하죠. 계획단 분들도 서로에게 이해심이 생겨 다른 단원이 관심 있는 일을 먼저 하자고 양보하는 모습도 보이더라고요. 공동체의식이 생기고 있는 거죠."

그는 최근 여든 가까운 할머니 마을계획단 단원이 "계획단에서 열심히 기획하고 참여하는게 일상의 큰 활력이 된다"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아들에게 보내려다 실수로 계획단 단톡방에 올렸더라며 뿌듯해 했다.

다음달부터 2년 더 계약이 연장됐다는 박 주무관은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라 항상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한다"면서도 "혼자 하는 일인 만큼 주위에서 좀 더 업무를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예순 주무관이 북정마을 골목을 지나고 있다.
박예순 주무관이 북정마을 골목을 지나고 있다. 이희훈

#박예순 #마을코디 #북정마을 #찾동 #마을계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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