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 넘은 새댁, 오늘도 우산 들고 뛰겠네

장마철 시골마을 풍경

등록 2017.07.10 17:24수정 2017.07.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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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이번주말에 아버님 뵈러 갔다올까?"
  "응? 아버님? 우리 아빠? 무슨 날도 아닌데 왜?"
  "뭐, 아니 그냥, 아버님 들깨도 심으시고 바쁘셨다고 전화주셨더라구. 그냥 그 김에.."


며칠동안 감자 캐놓았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매일매일 딸에게 전화를 주시던 친정부모님은 주말에 내려가겠다는 말을 도통하지 않는 딸과는 더이상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금요일이 되자 장인이 직접 사위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얼떨결에 전화 받은 사위는 '바쁘지?'로 시작하신 다정한 장인의 말에 일요일 저녁 출장 스케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님, 내일 찾아뵐께요.'라고 전화를 끊고는 제게 주말 친정집 방문을 통보했습니다. 지난 주말 감자덕분? 아니 아버지의 전화 덕분에 계획에 없었던 친정집에 다녀왔습니다.

  "이봐라, 갓 캐낸거라 삶아놓으니 포실포실허니 얼마나 맛나게 생겼냐?"

장인의 핫라인 성공기념 딸과 손자들의 방문으로 시골집의 분위기는 감자 속살 속에서 껍질까지 '폭' 터트리며 하얗게 오르는 김만큼이나 뜨거웠습니다. 맛있게 삶아진 감자를 가운데 두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밖에 지나가는 한 할아버지를 보며 엄마가 말씀하십니다.

"호호, 저 노인네 비 잠깐 그쳤다고 과자사러 가나 보네."
  "과자요? 나이가 많으신거 같은데, 직접 과자 사러 걸어가신다구요?"
  "그럼, 저 노인네가 올해루 백 두살인데 매일 본인 먹을 과자사러 저렇게 걸어갔다 온다."

백두살 할아버지가 과자 사러 장에 가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백살도 아니고 백두살인 할아버지가 저렇게 정정하다니. 놀라는 저와는 상반되게 이건 뭐 그냥 일상이라는 듯이 뜨거운 감자에 소금을 조금 올려 한 입 베어무신 엄마는 말을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저 할아버지 손에 우산 들었나 봐라. 엊그제는 글세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걸어내려오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잽싸게 뛰어가서 우산 쓰고 가시라고 드렸네. 그랬더니 노인네 깔끔하기도 하지, 한 이틀 뒤에 우산을 싹 말려서 도르르 감아서 갖다 주더라니까."
  "엥? 백두살 할아버지 우산 씌어드리려구 칠십 넘은 할머니가 뛰어갔어요? 가다 넘어지면 어쩌려구?"
  "야, 할아버지 비 맞아 감기 걸리믄 어떻하냐? 그래서 내가 후다닥 뛰었지. 그리구 누가 할머니야? 할아버지에 비하믄 난 새댁이지."

그렇게 얘기하고는 72살 새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입니다.


"그럼, 우산 고맙다구 과자 하나 얻어 드셨어요?"
  "야, 말도 마라 그 노인네 밥해주는 할머니한테도 과자는 안 나눠준다더라. 근데, 그걸 날 주냐?"

과자부스러기 하나 못얻어 먹을걸 알면서도 길가까지 우산 들고 뛰어간 72살 새댁은 혹여나 비가 또 떨어지면 어쩌나 하며 벌써 저만치 걸어간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는 오른손에 검정색 우산 하나 들고 힘차게 과자사러 걸어가십니다.  

오늘 아침은 어제 받아온 감자를 채썰어 볶은 '베이컨 감자볶음'으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 그런데 오늘도 비가 쏟아 부었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합니다. 시골 집의 울엄마, 집안에서 빼꼼히 내다보다가 혹여나 백 두살 할아버지 우산 안들고 과자사러 나서시면 앞뒤 안보고 뛰어갈까 걱정됩니다. 비속으로 막 뛰어가는 72살 새댁의 스피드, 조금만 줄이시라고 맘속으로 빌어봅니다.
#장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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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소중한 이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며 멋지게 늙어가기를 꿈꾸는 직장인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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