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 나간 뒤 식당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고 이규상, 조영화 노부부는 환하게 웃었다. 뒷 배경 그림작품은 이 식당사장 이규상씨가 직접 식당벽에 그린 그림이다.
박정연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살았을 법한 외모를 가진 분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잘 사는 모습이 내심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이분 역시 남편을 닮아 유쾌하면서도 소탈하고 스스럼도 없다. 밝은 표정으로 손님들을 늘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은 무척이나 다정다감해 보였다.
시원한 앙코르 맥주를 주문한 뒤 이규상 사장께 자리를 권했다. 다소 망설이는 표정으로 자리를 마주해 맥주 한잔을 들이키더니 금세 표정은 더욱 밝아진다. 기자를 향해 흐뭇한 미소까지 보낸다.
"방송이 나간 뒤 손님들이 많이들 찾아와요" 기자가 묻기도 전에 이규상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심지어 한국에서 우리 부부를 보러 찾아온 한국 손님들도 있다는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식당 장사가 잘 된다니 기자도 반갑고 기뻤다.
"여기 사시면서 뭐가 제일 힘드셨나요?"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이규상씨는 "힘든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신 "손님이 없어서 그냥 쉬고 있을 때, 그게 제일 힘들다"며 또 다시 껄껄 웃는다.
낙천적이고 온화하다는 그 분의 성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규상씨는 한국에서 전자부품관련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 은퇴를 한 뒤 아내와 무작정 외국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린 곳이 캄보디아의 작은 해안도시 시하누크빌이다. 과거에는 컴퐁솜으로 불리던 곳으로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 이름을 따 만든 유명 해안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부부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후 그동안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좋은 일들도 많이 경험했다. 하지만, 숨기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들도 적잖이 겪었다며 이규상씨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바닷가에 처음 문을 연 식당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눈물을 흘리며,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던 사연부터, 이후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어, 여기저기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던 일까지 털어놨다.
다만 한국에 있는 자식들한테는 일절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행여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서다. 그래도 이 부부의 자식들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자식들이 가끔식 소포로 보내주는 건강 음식과 선물들도 이 노부부에겐 삶의 가장 큰 행복중 하나였다.
노 부부는 지금은 이곳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에 온 지 10년이 거의 다 됐지만,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까지 했다.
"여기서 사는 게 좋은데 굳이 한국에 가서 살 필요가 있나요?"부인 조영화씨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건강만 허락한다면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내심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제를 돌려 남편 이규상씨는 요즘 들어 중국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떤 날은 한국 손님보다 중국 손님들을 비롯해 다른 나라 손님들이 훨씬 많을 때도 있다고 했다. 이규상씨 말대로 요즘 해안 관광도시 시하누크빌은 온통 중국인들 천지다. 프놈펜처럼 해안가 전망 좋은 곳에 새로 짓는 고층빌딩 대부분은 중국자본들이 들어와 짓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저녁시간 식당 테이블 절반은 이미 중국 손님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손님들은 부인 조영화씨가 주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툰 중국어 실력이지만, 주문을 받는 데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현지 단골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농담을 할 정도로 크메르어 실력도 제법이다.
이규상씨는 그런 아내가 한없이 고맙고 미안하기조차 한 듯 싶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평생 아내한테 큰 소리 한번 낸 적이 없다며 본인의 아내 사랑을 늘어놓는다. 함께 사는 아내를 존중해줘야 평생 잘 살 수 있다는 인생 선배다운 조언까지 해주신다.
부부가 캄보디아에 온 것은 10년 전 쯤이다. 우연히 여행을 왔다가 푸른 바다가 좋고,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 결국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됐고, 한국 배낭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다보니 식당까지 운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난 방송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처음 왔을 당시에 비해 이 도시가 참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잠시 화제를 돌렸다. 과거 10년 전 캄보디아의 생활상과 도시풍경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공통 주제 삼아 담소를 나눴다.
"그땐 시내에 전기도 별로 없고, 밤이 되면 그저 도시 전체가 온통 깜깜해 어디도 가지 못했죠.""맞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랬었죠." 기자도 잠시나마 이 나라의 과거 모습들을 떠올리며 맥주 한잔을 다시 들이켰다.
문득, 식당 양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페인트로 그린 작품들이 여럿 있다. 전문화가 솜씨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름 열심히 잘 그린 그림들이다. 굳이 점수로 평가한다면 85점 정도.
이 그림들은 모두 부부가 직접 그린 작품들이었다. 한 쪽 그림을 가리켜, 내가 그린 그림이라며, 이규상씨가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도 질세라 바로 옆 그림을 보여주며 "내가 더 잘 그리지 않았느냐" 묻는다. 대답하기 곤란해 그냥 웃고 말았다.
'부창부수'란 말은 이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평생 함께 살아온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느껴졌다. 손수 그렸다는 작품 앞에서 노부부에게 다정한 포즈를 요구했다.
처음 방송국에서 촬영제안이 왔을 때 이규상씨는 "식당 운영하는 게 전부이고 하루 일과가 뻔한데, 뭐 찍을 게 있냐"고 고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방송작가가 집요하게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승낙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두고 두고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방송을 타니 홍보도 많이 되고 장사도 더 잘되니, 이것처럼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규상씨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껄껄 웃는다.
그러고 보니 식당앞 간판에 '서울식당'이란 이름 말고, 'KBS 인간극장 나온 집'이라 쓴 큰 광고글씨가 보였다. 옆에 있던 부인이 "이것 역시 우리 남편의 작품"이라며 웃는다.
마침, 방송에서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이 비춰졌던 캄보디아 주방요리사 완이가 잠시 주방을 나왔다. 방송에서 볼 때 보다 얼굴에 살이 조금 더 올라와 있었다. 한국어도 곧 잘하고 손님을 대하는 표정도 좋았다. 성실한 친구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어시험공부를 하던 모습이 기억이 나서 시험결과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