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민청련동지회
7월 중순쯤 최민화가 근무하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박우섭이 찾아왔다. 박우섭은 다짜고짜 따졌다.
"형이 우리 운동권을 말아먹을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우?"최민화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은 누군가를 새 청년단체 의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최민화는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고 했다.
"잘하면 이상적인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2주 후에 다시 와라."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김근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물러날 박우섭이 아니었다. 박우섭의 집요한 물음에 최민화는 지금 김근태와 교섭 중이라고 전말을 고백하고 말았다.
박우섭은 원래 구월동 시절부터 김근태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서 김근태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적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잘못되면 1회용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민청련 의장에, 김근태를 써먹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김근태를 자주 만나면서도 그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장 문제가 잘 안 풀리고 있는 이때 최민화의 노력이 성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7월 말, 최민화가 세 번째 김근태를 만나는 날, 김근태는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한다. 최민화의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는 눈물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근태의 결단김근태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영달, 조성우, 이해찬, 박계동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운동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맞는 거냐, 또 어떻게 만들 거냐, 누가 책임을 질 거냐,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복잡한 문제였죠.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 (중략)... 최민화가 나한테 와서 설득을 하더군요. 그는 내가 선배 그룹이라는 것, 학생운동을 떠난 뒤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그런 내가 대표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일단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게 대체로 '그게 옳다,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한 사람보고 '당신이 해봐라'라고 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최민화가 와서 권유한 것도 있지만, 그런 상례에 따라서, 말하자면 뒤집어 쓴 거죠."사실 김근태는 구월동 사람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이미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생각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최민화가 찾아와서 그를 의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김근태는 같은 인터뷰에서 민청련 결성을 필요로 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공개적으로 국민에 다가가지 않고는 정권과 싸우는 깃발이 있다, 싸우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국민에게 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한 3년 가까이 되고, 물가를 잡고 경제도 안정돼 있었어요. 전두환의 헤게모니가 확립됐다, 세상도 그렇게 느꼈고, 또 전두환 그룹도 그렇게 느껴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좀 풀어주기 시작했어요.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아주 혼내고 그랬는데 덜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그 기회, 틈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다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구속돼서 복역하고 나온 청년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들은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거 가지고는 정권과 맞설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 국민들 속에서 유화 국면이 되고, 분위기가 다시 솟는 시점에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거는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책무다. 그래서 민청련이 결성된 거죠."김근태가 술회한 대로 그는 최민화의 집요한 노력에 '엮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 진술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엮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근태는 7월 말 세 번째로 최민화가 찾아왔을 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중순경부터는 OB, YB가 함께 모이는 민청련 결성 준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김근태 의장이 준비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