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만인의총 사당
정만진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경상도를 거쳐 한강으로 북상했다.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남해안을 거쳐 전라도로 진격했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7월 16일 거제도 북서쪽 칠천량 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대파한 일본군은 경남 하동, 전남 구례를 지나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은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진입하는 관문이자, 장차 전주로 나가는 입구였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이 벌어졌을 때 명나라 군대도 남원에부터 군대를 주둔시켰다. 3000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을 지키고 있던 명군 부총병 양원은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 병사 이복남에게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했다. 이복남은 관군 1000명을 이끌고 남원으로 갔다.
그에 비해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우키타 히데이에)를 주장으로 한 일본군은 무려 5만 6000여 대군이었다. 적은 8월 13일 남원성을 포위한 후 조총을 쏘며 공격해 왔다. 조 · 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퍼부어 적을 격퇴했다.
아군은 4000명, 적군은 5만6000명첫날 공격에 실패한 적은 다음 날부터 높은 누각을 세우고, 거대한 사다리를 새로 제작하고, 성 밖 참호를 메우는 등 본격적인 재공격 준비에 돌입했다. 군대의 규모가 워낙 차이가 났으므로 양원은 전주에 주둔 중인 유격장 진우충에게 두 차례에 걸쳐 지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워둘 수는 없다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양원과 이복남 군은 외부 지원 없이 홀로 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2차 진주성 싸움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16일 적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적은 높은 누각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아대고, 아군이 몸을 움츠리는 사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밤이 되자 왜군은 명군이 지키던 서문과 남문을 뚫고 성안까지 들어왔다.
패전 앞두고 스스로 불 질러 자결하는 아군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복남을 비롯한 조선군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양원은 50여 기를 이끌고 탈출했지만, 아군 군사와 백성 1만여 명은 장렬히 옥쇄했다. 뒷날 사람들은 이곳에 큰 묘소를 만들고 그 이름을 '만인 의총(萬人義塚)'이라 했다.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주성의 진우충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은 싸움도 없이 전주를 무혈로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