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장사가 호황이던 시절, IMF도 모르고 지냈다

40여년 역사의 충남 예산군 ‘퇴계로 오토바이’

등록 2017.09.15 10:38수정 2017.09.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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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선 철도개량사업으로 철거된 옛 경북농원 건물 전체를 임대해 센터를 열었던 시절(1983년쯤)에 센터 앞에서 직원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이회관 사장이고, 옆에선 사람이 김종서 기사다. 당시 유행했던 장발이 이채롭다. 센터 마당에는 70~80년대 인기가 좋았던 기아혼다의 CL90 오토바이가 보인다.
장항선 철도개량사업으로 철거된 옛 경북농원 건물 전체를 임대해 센터를 열었던 시절(1983년쯤)에 센터 앞에서 직원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이회관 사장이고, 옆에선 사람이 김종서 기사다. 당시 유행했던 장발이 이채롭다. 센터 마당에는 70~80년대 인기가 좋았던 기아혼다의 CL90 오토바이가 보인다.<무한정보> 이재형

인간생활사에서 과학의 발달로 이룩한 이동수단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자전거다. 그리고 자전거에 그치지 않고 사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기계를 발명했으니, 그 물건이 바로 오토바이다.


오토바이는 영어 오토바이크(auto bike)의 일본식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렇게 부르지 않고 모터싸이클, 모터바이크, 오토바이시클이라 한다. 어찌됐든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영향으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지금까지 오토바이다(법적으로는 이륜차). 시골 어른들은 살짝 격조있게 '오도바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인 1883년 영국에서 쇼브론 데이비스가 자전거에 증기엔진을 올려 동력을 얻는 것이 최초라고도 하나, 이후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것이 최초라는 주장이 강하다. 독일의 다임러는 친구 마이바흐와 함께 1885년 가솔린 기관을 발명했고, 그 엔진을 자전거에 달아 시험한 것이 오토바이의 시초였다는 얘기다.

이 물건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15년 원한경(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언더우드의 아들)씨가 미국에서 가져와 첫선을 보였다고 한다.

국내 최초로 생산한 오토바이는 1962년 기아산업이 일본 혼다와 제휴해 만든 기아혼다(대림의 전신)의 C100이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 '신기한 탈 것'인 오토바이가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관공서의 장급과 부잣집 사장님(또는 그의 아들)이나 타는 물건이었다. 그 뒤로 오토바이는 오랫동안 젊은이의 심장을 뛰게 하는 매력적인 기계로, 한적한 농촌과 복잡한 도심 곳곳에서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았다.


24살에 '사장'되다

 이회관 사장이 퇴계로오토바이센터 앞 마당에서 오토바이 수리를 하고 있다.
이회관 사장이 퇴계로오토바이센터 앞 마당에서 오토바이 수리를 하고 있다. <무한정보> 이재형

여기 40년 넘는 세월을 오토바이와 함께 달려 온 장인의 인생이 있다. 퇴계로오토바이(충남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사장 이회관(62)씨가 주인공이다.


예산읍 주교리에서 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소년티를 벗은 회관은 "앞으로 먹고 살라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예산역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때는 1975년으로 그야말로 보릿고개가 있던,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이었다.

19살 나이에 남들보다 일찍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할 처지였지만 그는 비관하지 않았다. 서울 퇴계로 일대를 헤매던 회관의 눈에 당시 성업 중이던 오토바이센터가 들어왔다.

"그때는 퇴계로가 오토바이 메카였어요. 오토바이 수리 기술을 배우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곧바로 취직을 했죠. '전국오토바이상사'였던 것으로 기억나요. 월급이래봤자 쌀 몇말 값 밖에 안됐지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고급기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만족했죠.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기름밥 곤조' 없이 신사적이었고, 고객들도 부자여서 만원짜리 팁도 나왔어요. 돈이 보였죠. 22살 군대 영장이 나올 때까지 그곳에서 오토바이 수리와 판매 같은 전반적인 것을 배웠어요."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다시 서울로 가지 않고 고향에 정착했다. 다른 사람이 하던 오토바이센터를 인수해 주교리 성신약방 옆(지하도 생기기 전)에서 간판을 올린 것이 지금의 '퇴계로오토바이'다.

"퇴계로에서 오토바이와 인연을 맺었으니 간판도 당연히 퇴계로로 했지요. 개업비용은 당시 소 두 마리 값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모아놓은 돈이 적어 아버지가 조금 대주고 일수도 얻어쓴 거 같아요."

그렇게 24살 청년 회관은 그 시대 전망있는 오토바이센터 사장이 됐다.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성공했다'는 말을 듣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퇴계로오토바이 사장은 서울서 고급 기술을 배워, 못 고치는 게 없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 90CC 오토바이가 많았는데, 이게 라이트를 키면 시동이 꺼져 버리네. 그런데 이걸 고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요. 이 근동은 물론 합덕에서까지 소문 들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고치러 왔어요. 어떤 날은 새벽 2시까지 잠도 못 자고 수리할 정도였으니까. 당시 오토바이센터가 예산읍에 대여섯곳 있었는데, 우리 가게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고 항의를 하기도 했죠."

개업한 지 1년 만에 이 사장은 보란 듯이 예산중학교 뒤에 근사한 단독주택을 올렸다. 성공의 증거였고,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왔다고 한다.

"열 몇차롄가 맞선을 보고 최고 예뻤던 22살 도고 아가씨와 83년도, 27살에 결혼을 했어요. 허허."

그때의 행복한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 사장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진다.

"넘들이 알까 무서울 정도로 돈이 벌렸어요.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 보면 바지 주머니에서 돈이 막 나오니까 '회관이 옷은 꼭 내가 빨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니까요. 직원들도 서넛씩 있었죠. 지금은 이게 사양길이라 기술 배우려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서로 기술을 배우려고 했어요. 어떤 양반은 자기 아들을 맡아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으니까."

이 사장 밑에서 기술을 배운 사람 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단다. 중학교 졸업하고 온 이주연 기사라고 있었는데, 인천서 오토바이센터를 차려 크게 성공했다. 예산읍 옛 대동병원 앞에서 종합오토바이센터를 하고 있는 박기철 사장도 5년 동안 기사로 있었고, 광시면에서 센터를 하고 있는 최병원 사장도 직원으로 있었다.

"쓸만한 기계인지, 엔진소리만 들어도 금방 안다"

 오토바이센터 안에서 부속품들을 정리하고 있는 이회관 사장. 오토바이를 수리하는 각종 연장들은 수십년 동안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오토바이센터 안에서 부속품들을 정리하고 있는 이회관 사장. 오토바이를 수리하는 각종 연장들은 수십년 동안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무한정보> 이재형

살다보면 운이 좋은 날도, 억세게 안 좋은 날도 있다.

"그때 잘나가던 오토바이가 S90이었는데, 하루에 9대를 판 날도 있었어요. 한 대 팔면 10만 원이 남았으니까 하루에 90만 원을 번거지. 90년대였으니까 큰 돈이죠.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만 원짜리 한 묶음을 내놓더니 한 번 타보고 사겠다고 해서 키를 줬는데 암만 기다려도 오지를 않네. 아차 싶어 돈을 보니 겉에만 만 원짜리고 안에 거는 종이 오린거야. 그냥 속았지, 뭐. 허허."

그렇게 90년대까지 20여 년 호황기가지속됐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오토바이는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읍면사무소와 농촌지도소 같은 기관의 장들이나 오토바이가 있었지, 대개가 자전거였다. 그리고 또 한 부류, 과수원 하는 사람들. 그땐 과수원이 부자인 시절이었다. 대낮에 다방이나 식당 앞에 받쳐놓은 오토바이는 대부분 그 사람들 거였다.

당시 예산군내 오토바이수는 대략 300대 정도였다고 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농촌 이동수단이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급속히 바뀌었다. 그야말로 호황기였다. 오토바이 기종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대중적인 기종을 살펴보면 70~80년대엔 기아혼다의 S90, CL90, CB90이 많이 나갔다. 80년 이후는 대림혼다의 CB125, DH88, 효성스즈끼 GP125, 그리고 90년대엔 스쿠터(텍트)가 인기를 누렸다. IMF도 모르고 지날 정도로 장사는 잘됐다.

 30여년 전에 대림혼다가 출시한 CBX125다. 신암에서 90세 어르신이 타던 오토바이란다. 이회관 사장은 “참 잘 만들어진 기계다. 지금도 아무 이상없이 잘 나간다”며 ‘엄지척’을 했다.
30여년 전에 대림혼다가 출시한 CBX125다. 신암에서 90세 어르신이 타던 오토바이란다. 이회관 사장은 “참 잘 만들어진 기계다. 지금도 아무 이상없이 잘 나간다”며 ‘엄지척’을 했다.<무한정보> 이재형

특히 스쿠터는 무변속엔진으로 여성들도 치마를 입고 탈 수 있게 앞트임으로 설계돼 선호도가 높았다. 다방에서, 중국집에서 배달의 선두에 섰던 기종으로 대림혼다의 메시지50, 효성서 나온 프리마50이 대표적이라고 이 사장은 설명한다.

안 고쳐 본 오토바이가 없고 이젠 엔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인지 알 정도로 '장인'의 경지에 도달했는데, 2000년을 열면서 오토바이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시대변화가 안타깝긴 하지만 지난 40년 세월 원없이 일했고 보람있는 일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아들만 둘을 낳아 대학까지 가르치고, 결혼시켜 재금냈다. 아들은 예산읍에서 SK텔레콤 예산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봉사도 할 만큼 했다. 의용소방대와 자율방범대 활동을 각각 6년씩이나 했고, 모교인 금오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장도 지냈다.

"일거리가 많이 줄긴 했지만 살림하고 내 용돈은 벌어쓰니까 그만하면 됐죠. 요즘은 출장이 잦아요. 오토바이가 고장 나면 옛날같이 끌고 나오지 않고 와서 고쳐달라고 부르니까요. 가끔 고가의 중고 외제 오토바이를 사는데 함께 가서 봐달라는 부탁도 들어와요. 우리는 엔진소리만 들어봐도 쓸만한 기계인지 대번 아니까. 그렇게 저렇게 조금씩 벌어쓰면 되지, 더 이상 욕심 안 내요. 또 자식들 가까이 살아 좋고, 손주들 크는 것 볼 수 있어 좋고, 더 이상 뭐가 필요해. 아들들한테도 '성실근면하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얘기만 해요. 그게 내 좌우명이니까."

말을 끝낼 때마다 벙싯 웃는 그가 환갑이 지난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는 것은 낙천적인 성격 때문 아닐까.

오토바이 타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농촌 어르신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간편 교통수단이다. 배달통을 싣고 골목길을 누비기에 오토바이 만한 게 없다. 아마도 이회관 사장은 정년없이 한참 동안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오토바이 #오토바이역사 #오토바이수리 #교통수단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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